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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름한원숭이116
갸름한원숭이11622.12.20

일제 강점기 일본의 만행에는 무엇이 있나요?

한국사를 배우면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던 시절에 여러 악행들이 있었다는데 알려진 악행들은 많지 않던데 일본의 만행에는 무엇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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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놈들의 만행 많이 알려졌습니다.

    식민지인라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 왕을 어떻게 했습니까

    위안부 를 만들어 어떻게 했나요,강제징용으로 인한 고통과 죽음어떻게 했으며 의병과 독립운동가를

    어떻게 했고 지들 전쟁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끌고 가서 어떻게 했습니까, 조선 방방곡곡을 어떻게 했나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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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2.12.20

    조선인의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박탈하고, 정치, 문화, 계몽 단체도 모두 해산시켰습니다.

    1912년, 총독부는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자신이 소유한 땅을 모두 총독부에 신고하고, 신고되지 않은 땅은 주인이 없는 것으로 알고, 몰수하겠다고 명령했습니다.그러나 신고하려면 절차가 매우 복잡하여 대부분의 농민들은 신고를 제대로 못하거나 기한을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또 일부는 일제에 대한 반발감으로 신고를 거부하였으며, 신고를 했다 하더라도 일본인과 친일파지주로 구성된 지주위원회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했습니다.

    조선 민족의 얼을 해치기 위해 경복궁의 일부를 뜯거나 개조하고, 근정전 남쪽에는 조선 총독부 청사를 건립했습니다.또한 창경궁 안에 동물원을 만드는가 하면, 권농장이던 넓은 터전에 연못을 파고, 연못가에는 일본식 정자를 지었습니다.그리고 그 뒤쪽에는 식물원을 짓고, 통명전 뒤의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고, 창경원으로 불렀습니다.왕의 산책로에는 일본 국화인 벚나무를 심는 등, 일제의 민족성 말살 정책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고 치밀했습니다.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각 관공립 학교와 사립 학교에 신사 참배를 지시하고, 이후에는 기독교계 학교까지 참배를 강요했습니다.그러자 총독부에서는 기독교계 학교는 신사에 참배할지 페교할지 택하라고 협박을 했죠.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신사 참배를 시키도록 했습니다.

    일제는 조선인을 일본 천황의 신하와 백성으로 만드는 '황국 신민화'정책과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는 '내선 일체'라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이에 따라 조선인은 황국 신민의 서사 암송, 정오 묵념, 매일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것 등의 절대 복종을 강요당했습니다.일제는 또한 각 학교의 명칭과 교육 내용을 완전히 일본식으로 바꾸고, 조선어 사용도 금지시켰습니다.1940년에는 급기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당했습니다.이어 일제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으기 위해 거짓 선전을 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탄광, 금광, 비행장 건설현장 등에서 중노동을 시키며 혹독하게 부려먹었습니다.또한 지원병이란 명목으로 수많은 조선 청년들을 끌고가 총알받이로 내세웠습니다.

    일제는 수십만 명의 조선 미혼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중국과 동남아 등지의 전선으로 끌고가, 일본군들을 상대하는 일종의 '성 노리개'인 위안부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마루타 , 민족열사고문 ,등등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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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마도 가장 큰 학살은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아닌가 합니다. 1923년 9월1일, 도쿄와 요코하마 주변에는 정오 무렵 리히터 규모 7.9의 강한 진동이 관동 일대를 급습했다고 합니다. 진동이 멈추자 거리 곳곳에서 불이 났고. 순식간에 발생한 화재는 강한 바람을 타고 도시 전체를 휩쓸었지요.. 피난민으로 북적였던 육군 피복 야적장에 불이 옮겨 붙으며 4만 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벌어졌고 관동 지역 인구 1000만 명 가운데 이재민만 310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14만2000명이 죽고, 3만7000명이 실종됐다고 합니다. . 정작 지진보다 화재로 인한 피해가 더 컸다고 하네여. 거기에 더해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다는 다는 소문이 돌았고 결국 이 헛소문 때문에 일본 경찰과 군인이 동원되서 약 4일 동안 재일 조선인은 전부 죽였다고 하는데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보고한 바에 따르면, 관동대지진 당시 4일 동안 희생된 조선인이 6661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이 사건에 대한 배상이나 사과는 아직도 한번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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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도 없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지요. 식민지들 중에서도 일본의 식민지는 수탈 및 만행이 극에 달했습니다.

    1910년대 헌병경찰 시기 태형과 즉결심판이 횡행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 끝에 돌아가신 분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대표적이지요.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도 있는데 교회문을 못질하고 불을 질러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1920년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참변을 일으켜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으며, 관동대지진 때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며 닥치는 대로 보이는 대로 죽였지요.

    1930년대부터 1940년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징용으로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징병제로 전장에 총알받이로 내보내고 정신대를 통해 여성을 성노예로 삼아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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