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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노을
제주노을23.03.29

영동에 가면 노근리사건이라고 있던데 정확히 어떤건가요?

우리의 역사속에는 가슴 아픈 사건들이 많아서 슬프네요 영동 지나는데 노근리사건 이라고 적혀 있더라구요 노근리 사건은 정확히 어떤 사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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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0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2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6.25 전쟁 초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 제7기병연대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학살은 1950년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4일간 이어졌으나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상 때문에 조명되지 않다가 1999년 AP통신 기사를 통해 한-미 양국에 공론화되었다. 이후, 2000년 미국과 한국 두 나라는 별개의 조사단을 편성하여 실태 파악에 나섰다. 2001년 1월 12일 한, 미 양국은 조사 결과를 동시에 발표하였고 조사단 공식적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결론지었다. 생존자들은 사망, 부상 또는 실종 인원을 총 248명이라 신고하였으나 조사단은 이보다는 적은 숫자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진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2]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

    출처: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때 민간인을 인민군으로 오인하여 철도길을 따라 피난가던 사람들을 향하여 총을 쏘아, 굴속으로 숨었지만 굴도아닌 철길아래 작은 터널 그러니까 다리 아래였습니다.

    거의 다죽고 시체속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하여 진실이 밝혀진 사건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총탄 자국을 콘크리트로 발라 많이 감추어진 상태 입니다.


    영동군 황간면에 있습니다.

    황간역 간이역도 볼만하고 월류봉도 있고 매곡면 노천리에는 시인의 뜰도 볼만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학살은 1950년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4일간 이어졌으나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상

    때문에 조명되지 않다가 1999년 AP통신

    기사를 통해 한-미 양국에 공론화되었다.

    이후, 2000년 미국과 한국 두 나라는 별개의 조사단을 편성하여 실태 파악에 나섰다.

    2001년 1월 12일 한, 미 양국은 조사 결과를 동시에 발표하였고 조사단 공식적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결론지었다.

    생존자들은 사망, 부상 또는 실종 인원을

    총 248명이라 신고하였으나 조사단은

    이보다는 적은 숫자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출처:나무위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25 전쟁 초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 제7기병연대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학살은 1950년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4일간 이어졌으나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상 때문에 조명되지 않다가 1999년 AP통신 기사를 통해 한-미 양국에 공론화되었다. 이후, 2000년 미국과 한국 두 나라는 별개의 조사단을 편성하여 실태 파악에 나섰다. 2001년 1월 12일 한, 미 양국은 조사 결과를 동시에 발표하였고 조사단 공식적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결론지었다. 생존자들은 사망, 부상 또는 실종 인원을 총 248명이라 신고하였으나 조사단은 이보다는 적은 숫자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다만 우발적 사고인지, 명령에 의한 사건인지를 두고 미국과 피해자 간의 이견이 있으며, 이 사건은 미군이 독소전쟁 때의 독일 국방군과 마찬가지로 점령지 주민들의 민심을 신경쓰지 않는 면모, 즉 전쟁에 대한 기초 상식이나 민사작전 능력이 부족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측면이 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No Gun Ri Case)은 한국 전쟁 당시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미군 1기병 사단 제 7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로와 쌍굴다리에서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잠입했다고 주장하며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민간인 학살 사건 입니다. 학살당한 이들은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였다고 전해져 충격을 주었지요.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6.25 전쟁 초반에 일어났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 제7기병연대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근리사건은 6.25 전쟁 초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 제 7기병연대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학살은 1950년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4일간 이어졌으나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상으로 조명되지 않다가 1999년 ap통신 기사를 통해 한-미 양국에 공론화 되었습니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지고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됩니다.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소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고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개근철교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1950년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이 경북 영동군 노근리 일대에서 수행한 대규모 학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북한군이 남침하여 전쟁이 발발한 직후, 군부들이 분노한 마음으로 "북침 동원자"라며 노근리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학살 작전을 진행하였습니다. 이 작전에서는 약 400명 이상의 노근리 지역 주민들이 살해되었으며, 여기에는 여성과 아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서 많은 비판과 충격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국내에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요시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이 사건을 비롯한 대한민국 군부의 인권 침해와 학살 사건들이 비난을 받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인권 침해를 인정하고, 피해자들과 가족들에게 유족지원 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 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황산만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양민 수백명을 사살한 사건 입니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미군이 노근리의 경부선 철도 아래와 터널, 속칭 쌍굴다리 속에 피신하고 있던 인근마을

    주민 수백명을 무차별 사격하여 수백여명이 살해.부상.실종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영동군 주곡리, 가리, 임계리 등에 사는 피난민들이 황간면쪽으로 이동하던 중


    미군 비행기에서 피난민을 북한군으로 오인하여 터널 주변에 모여있는 민간인을 사격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입니다.


    수십년 지나서 사격한 미군이 그 당시를 진술하고 사과한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폐교된 노송초등학교 근처에 노근리평화공원도 만들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