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냥년이라는 우리나라의 가슴아픈 역사에 대한 질문입니다.
역사 시간에 화냥년이라는 가슴아픈 주제에 대해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근데 왜 이름이 화냥년이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요.
가슴아픈 역사이지만 기억을 해둬야 할 거 같아 질문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냥년
생성시기
조선, 1637년(인조 15년)
유래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끌려갔던 여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의 환향녀(還鄕女)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은 약 60만 명 정도인데, 이중 50만 명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이 귀국하자 엄청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적지에서 고생한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기는커녕 그들이 오랑캐들의 성(性) 노리개 노릇을 하다 왔다고 하여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몸을 더럽힌 계집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병자호란 이전 임진·정유 양난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환향녀들은 가까스로 귀국한 뒤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았는데, 선조와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대신 첩을 두는 것을 허용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다.
이 무렵 영의정 장유의 며느리도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와 시부모로부터 이혼 청구를 당했다. 처음에는 인조의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장유가 죽은 후 시부모에게 불손하다는 다른 이유를 내걸어 결국 이혼시켰다고 한다.
환향녀들이 이렇게 사회 문제가 되자 인조는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여성들에게 “홍제원의 냇물(오늘날의 연신내)에서 목욕을 하고 서울로 들어오면 그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환향녀들의 정조를 거론하는 자는 엄벌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핍박은 그치지 않았다. 특히 환향녀의 남편들은 이혼은 왕명 때문에 하지 않더라도 다른 첩을 두고 죽을 때까지 돌아보지 않는다거나 갖은 핑계를 대서 스스로 나가도록 유도했고, 시집을 가지 않은 처녀들의 경우에도 스스로 자결하거나 문중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등, 수많은 환향녀들이 죽을 때까지 수모를 받았다.
화냥년 또한 ‘호로’와 마찬가지로 신계영이 속환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포로 6백여 명을 데리고 돌아온 1637년을 생성 시기로 잡는다. 이후로도 많은 포로들이 도망치거나 속전을 내고 귀국했다.[네이버 지식백과] 화냥년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2012. 1. 20., 이재운, 박숙희, 유동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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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으로 이야기 하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붙잡혀 갔던 여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여인들이 몸을 버린 여자들이어서 그들을 지칭하던 '환향녀'가 오늘날의 뜻을 가진 '화냥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처:국립국어원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참 가슴아픈 역사지요...ㅠㅠㅠ
일반적인 화냥녀의 뜻은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 , 서빙질하는 여자 라는 뜻이지만 화냥녀라는 말은 "환향녀"에서 유래된 말이다. 금의환향의 그 환향이다.
환향녀는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뜻인데 병자호란 때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항복했다. 청나라 황제에게 세번의 굴욕적인 절을 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면서 퍠배의 대가로 20만명이상의 수많은 조선 여자들이 포로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렇게 끌려갔던 여자 중에 죽을 각오로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여자들이 생긴다. 천신만고 끝에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환대는 고사하고 정조를 빼앗겨놓고 무슨 낮짝으로 고향에 돌아왔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렇게 정조를 잃고 돌아온 여자를 가리켜 환향녀라고 불렀고 이것이 욕으로 변해 화냥녀, 화냥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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