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이 신돈을 죽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신돈이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의 가족들에게 부당한 혜택을 제공하거나, 공민왕의 아내인 노국공주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신돈이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기존의 귀족 세력과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민왕이 신돈을 죽인 것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너무 커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긍민왕은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여섯 명의 임금들이 원의 부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반면에 공민왕은 12살에 원황제의 호위를 위해 원나라에 가서 제국이 몰락함을 직접 보고 귀국하여 31대 공민왕으로 즉위합니다. 즉위하자 변발을 바꾸고 부원파세력(친원파)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신돈과 함께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세가들이 농민들에게서 침탈했던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는 등 개혁정치를 펼치게 됩니다. 그러나 신돈은 중앙 관료들을 다 장악하지 못하자 사심관 제도 등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하다가 공민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