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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름한칠면조122
갸름한칠면조12223.06.25

조선 태종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왜 망나니 짓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조선 태종의 첫째이자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명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었던 뛰어난 인재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생하고 놀아나고 학문을 게을리 하는 등 태종 이방원의 눈밖에 나서 세자 자리에서 결국 쫓겨났는데 이게 동생이었던 이도, 즉 세종대왕의 우수한 점을 보고서 일부러 세자 양위를 하기 위해서였다는데 사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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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5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04년(태종 4)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 범절이라든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이나 엄격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하는 등의 자유분방한 풍류 생활을 더 즐겼다.


    이와 같은 품행은 부왕인 태종의 눈에도 걱정스럽게 비쳤으며, 엄격한 유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몇 차례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심한 벌을 주기도 했으나, 끝내 부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418년에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그런데 양녕대군이 왜 그러한 파격적인 행동을 했으며, 세자의 지위를 잃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동생인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종과 매우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되었다. 하지만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러한 특이한 생애는 후세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듯하며, 재미있는 일화도 적지 않다. 특히 시와 서에 능하였다.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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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화나 드라나에서는 양녕 대군이 마치 세종에게 왕권을 양보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세자 자리에서 쫗겨 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양녕 대군은 동생 충녕 대군과 사이가 안 좋았고 충녕 대군( 세종)은 그릇이 작아 왕이 될 그릇이 못 된다고 자신의 아버지 왕인 태종에게 간언은 올리고는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계유 정난 후에도 안평 대군을 죽이는데 앞장 섰고 단종을 처단 하는 데도 앞장 섰던 인물 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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