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종에게는 실권이 없었나요?
태종 이방원이 바로 왕위에 오르기에는 형들이 있는데 왕이 되려한다는 이유로 일으켰던 1차왕자의 난의 명분을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서 정종을 징검다리삼아 왕위에 오를 시도를 하는데 당시에 정종에게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00년 초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의 사이에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하륜 등이 내세운 적장자가 후사가 없으면 나머지 아들로, 나머지 아들이 후사가 없으면 서자가 계승한다는 승계 원칙에 따라 나머지 아들 중의 하나인 정안군 이방원이 책봉됩니다.
제 1, 2차 왕자의 난과 정종의 즉위과정을 볼 때 당연한 수순이었고 정종은 왕위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한 공로는 정안군 이방원의 몫이 크다고 하며 정안군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힘을 더했습니다.
즉 정종은 진안대군이 사망후 장남이 되어 다음 임금이 될수 있는 강력한 정통성을 가졌음에도 권력욕이 없어 의안대군에게 세자의 자리가 갔음에도 큰 반발이 없었습니다.
왕이 되었으나 실권은 모두 동생인 이방원이 쥐고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재위기간동안 격구나 사냥을 즐기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종은 권력욕과 야심이 없었기에 실권이 있었음에도 이방원의 왕위 찬탈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정치적 실권을 행사할 처지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실권이 없는 왕이었다고 합니다.
신도( 한양)에서 일어난 형제간의 골육상쟁, 즉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투쟁의 장이된 한양을 떠나 구도인 개경으로 돌아갔습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실세인 동생 정안군(이방원)을 왕세제로 삼을 수 밖에 없었고 이방원의 뜻에 따라 왕족 ·권신) 등이 기르던 사병(私兵)제를 폐지하여 삼군부에 편입시키면서 지방 세력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며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하륜의 건의에 따라 관제를 개혁하고, 한양의 5부에 각각 학당을 설립하였습니다.
정종의 정치적 판단과 결정은 거의 동생 이방원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정종은 재위 기간동안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 오락에 심취하였으며 그의 이런 행동은 이방원을 안심케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즉위한 지 2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추대되었는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개국에는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성계는 이방원의 야욕을 간파하고 계비 강씨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습니다. 이에 이방원은 분노하여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과를 왕위에 옹립합니다. 그가 정종이며 정종과 왕비사이에 후사가 없자 하륜 등이 왕세제로 이방원을 옹립하였고 이방원과 이방간 사이에 권력다툼으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를 계승합니다. 형식상 정종의 양자가 되어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적장자계승의 원칙을 지키려했습니다. 정종도 상왕으로서 이방원을 지지하여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종은 원래 왕위에 뜻이 없던 인물 이였습니다. 원래 왕이 되는 순간 부터 이방원( 태종) 에게 왕위를 선위 할 목적으로 2년간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고자 왕이 된 것 입니다. 이것은 정종 자신의 욕심이 없고 더 이상 형제 끼리 죽고 죽이는 일을 원하지 않아서 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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