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명나라가 참전한 계기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중국 명나라에서 군사를 보내어 일본에 맞서 같이 싸웠는데요 명나라가 참전한 계기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의 참전은 외적으로 보면 조선의 청원에 의해 구원을 하는 모습이지만 내면적으로 오히려 조선의 힘을 빌려 명을 지키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북쪽에는 북원과 적대적이라 토목의 변이 일어났으며, 남쪽 국경에는 베트남과도 전쟁을 치뤄 점령했다가 물러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주에서 후금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판국에 일본이 명을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나서고, 명과 국경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큰 위기 상황에 직면합니다.
반면에, 조선은 건국이후 명나라에 침략은 커녕 절대적인 우호국이었으니, 당연히 조선을 살려두는게 명나라에 이득이 됩니다. 조선은 명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입술과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쌓이는건 명나라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원병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나라군의 참전 이유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명백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고로 여러가지 잡스러운 야사들이 많지만 사실 이 전쟁의 목적부터도 그렇고 전략적으로 봐도 명나라가 참전할 이유는 충분했다.
우선 상술한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명분은 명나라를 정복[唐入り]하여 대륙에 진출하는 것이었지, 단지 조선을 정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본래 도요토미가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통보한 요구 사항도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정벌할 것이니 조선은 (명을 치는 데) 앞장서라며 이러한 의도를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런데 당시 조선과의 일본의 경계에 위치하여 양속관계에 있던 대마도의 도주 소 요시토시는 그 요구 사항이 조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불손한 내용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국서의 내용을 온건하게 돌려 말한답시고 살짝 바꿔서 전했는데, 그마저도 가도입명(假途入明), 즉 명을 치러 가려 하니 조선은 그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했다. 이에 머리끝까지 화난 만력제는 비전투지원은 물론이고 대규모 파병을 실시했다.
따라서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적대적인 데다가 병력을 20만 이상 동원할 수 있는데, 조선을 집어삼키면 국력이 더 커지고 명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려 요동, 동남부 해안가, 그리고 수도 북경까지 위협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명나라의 동북 국경에 못해도 수십만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하고 그 대가로 막대한 군비를 감당해야 한다. 반면, 조선 왕조는 개창 전부터 조공국으로서 큰 마찰없이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으니 당연히 변경의 울타리 역할을 맡은 조선을 살려두는 게 명나라에 이득이 된다. 주변에 적국을 늘리는 것은 명나라로서도 결코 바라지 않을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만력제 본인에게도 임진왜란 참전은 상당히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이미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만력제는 후계자 문제로 인한 쟁국본과 본인의 태업으로 인해 신하들과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따라서 만력제는 권위를 확보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터진 임진왜란은 만력제로선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위기에 처한 번국인 조선을 구원하고 감히 천조의 질서를 어지럽힌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명분은 천자로서의 위엄을 떨치고 권위를 확보할 매우 확실한 방법이었다.
결론적으로, 단기적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게 명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참전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실제로 임진왜란은 만력제가 동의한 것도 사실이나 더 중요한 건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의 적극적인 참전 주장 때문이었다. 석성은 홍순언과의 야사가 유명하지만, 종계변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야사는 야사. 실제로는 저런 야사 때문에 조선을 도운 게 아니라 병부상서를 맡았던 인물인 만큼 당시 명나라의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명나라군의 참전과 역할
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명나라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든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나라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
명나라군의 참전은 의의가 없지는 않았지만 명나라군이 지나치게 폄하당하는것에 대한 반발인지 재평가를 넘어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임진왜란에서 명나라군 덕분에 이긴 전투는 실질적으로 4차 평양성 전투밖에 없다. 심지어 4차 평양성 전투도 제대로 이겼다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는 전투이고 조선군도 1만명이 함께 싸웠기에 승리할 수 있었던 전투이다. 명나라군이 형편없는 군대였다면 전쟁 중 조선에서 명나라군의 편제와 교리, 무기를 다급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다만 명나라가 건국 초기 15만 군대로 북원을 쓸어버리고, 20만 군대로 베트남까지 원정가서 베트남 호왕조를 무너뜨릴 정도의 군세를 자랑했지만 유독 왜구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명나라 초부터 국토 동남해안을 탈탈 털렀으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몇십년 전 정규군도 아닌 사실 이 왜구들이 이후 정규군으로 편제되었지만 아무튼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 남부가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명나라군이생각보다 약했다고도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왜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이때 파병된 명군은 (해외파병의 성격상 당연히) 정예군이었고 열심히는 싸웠다.
제1차 조승훈의 3,000~5,000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0,000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불랑기포라는 신무기로 포격해(육상군 주제에 대포 500문을 퍼붓는 중국의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평양성을 탈환(1593년 1월 27일)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고, 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 상태를 벌인다. 그 뒤 일본군은 행주대첩에서 패배, 북쪽으로는 명나라군과 동장군, 남쪽으로는 조선군으로 쌈싸먹힐 위기에 처하였고, 연합군과 교섭을 진행하여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1593년 5월 18일) 다만 한양 수복을 위해 12만 대군을 박박 긁어모은 조선은 벽제관에서 패배하고 그대로 셧다운 상태가 되어버린 명나라군 5만까지 17만의 보급물자를 대느라 하루하루 말라죽었고, 결국 한타 싸움이 아니라 장기전 압박과 협상으로 한양을 탈환하긴 했지만, 이때는 보급물자도 민생도 파탄나버린 후였다. 이렇게 올인 한타를 벌였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식량소비량 급증 +식량생산량 급감) 조선은 병력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여송이 평양부를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도 조총으로 명나라군을 엄청나게 사살한 끝에 고니시와 그의 군대는 안전하게 평양에서 빠져나온다. 그렇다고 해도 평양성 탈환으로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당장 고니시가 평양부 점령 후 선조를 추격하지 않은 것도 고니시군이 공세 종말점에 도달해 여력이 없었던 점도 있지만 명나라군의 참전에 대한 소문이 심리적으로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만약 고니시군이 지치지 않고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지원이 없었다면 이순신이나 조선군과 의병의 활약도 의미가 없이 전쟁이 거기서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원나라 시대에 쓴 《송사》에는 한세충과 같은 사기적 명장이 있어도 지도자인 황제가 한심해서 금나라에게 결과적으로 지고 있었는데, 선조도 명나라로 도주할 생각까지 했던 만큼 그와 비슷한 한심한 작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명나라군은 전선이 명나라 땅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본인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란 중 각지에서 명나라군은 조선군과 연합해 활약했다. 비록 많은 추태와 패배를 하기도 했지만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전쟁 막바지에는 유정과 같이 명 육군이 전투를 회피하는 일이 빈번히 생겨 이순신 장군이 조금 고생하기도 했다. 반면 명 수군을 이끌던 진린은 유정과 달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같이 싸우긴 했다. 대표적으로 노량 해전에서는 일본군이 철수하므로 명군은 더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지만 진린은 끝까지 이순신과 협조했고, 자신이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비록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순신은 물론 자신의 휘하 장수인 등자룡을 잃었다.
더불어 명나라군이 대규모의 육군을 파병하게 되면서 조선은 그때까지 유지하던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숫자를 줄이게 된다. 병농 일치제인 조선에게 있어 생산 가능 인구를 군대에 잡아두는건 국가 생산력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란으로 조선 경제가 굉장히 피폐해진 상태여서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어 농사짓게 하는일이 급했다. 한때 17만에 육박했던 조선군은 명나라군의 참전 이후 크게 줄어든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명나라군은 후반의 조선 조정의 주요 탱커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고, 정유재란 때는 대규모 파병으로 아예 명나라군이 주력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은 최대 17만, 명나라군은 약 5만~7만 4천 명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군은 약 3만, 명나라군은 9만~11만 7천 명에 달했다.
조선인에 대한 약탈이 엄청나게 심했던 명나라군이 아니라 명나라가 조선에 큰 도움을 준 바가 또 있다. 가령, 임진년 이후부터 명나라는 산동 등지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현지의 명나라 병사들과 조선인들에게 뿌렸는데, 이 덕에 전쟁과 기근[154]에 따른 조선의 식량 사정이 나아졌다.
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선조는 이후 재조지은이라며 명나라군을 드높이는데 이는 명나라군의 역할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당시 선조가 조선군의 업적을 깡그리 무시한데는 정치적 입장도 반영되어 있다. 한국의 TV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민족주의 + 근대 이후로 중국을 멸시하게 된 풍조 + 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명나라군의 활약을 묻어가는 경향이 강한데, 그리고 백성에게 패악질을 한게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경략 송응창은 조선에서 명나라 병사들의 대민약탈을 항의했을때 사과했고 군대와 그를 지휘하는 장수들에게 군령삼십조(軍令三十條)를 하달하여 군기를 확립시켜 조선의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군령 삼십조'에는 조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명하는 조항이 3개가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관과 장졸들은 조선의 지방을 지나며 개와 닭이라 할지라도 놀라지 않도록 하여 조금도 범하지 말 것, 감히 민간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5조), '조선 부녀자를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6조), '조선의 강산은 곧 황상의 강산이며 조선의 백성들은 황상의 백성이니 함부로 조선의 남녀를 죽이거나, 투항한 자나 부역한 자를 죽이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20조)]였다. 게다가 명나라군의 개개인 단위의 횡포와는 별개로, 명나라 조정은 공식적으로 조선에 식량까지 지원해줬다. 또한 징비록에서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자 자기네 군량 50석을 내어줬다는 기록도 있다.
명나라는 피해를 준 부분이 있지만 분명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 일본이 이길 줄 알고 일본군에 붙거나 협력한 조선인들도 의외로 적지는 않았는데 명나라군이 참전해서 상대적으로 조선에 힘이 더 실려 그런 내부적 불안 요소를 제어할 수 있는 안정감이 생겼다. 일단 명의 황제가 계속 지원을 해준다고 하니 조선 혼자서 일본이란 강적과 싸울 때보다는 사기도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가 재조지은을 외친데에는 전란으로 인해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자국의 전쟁 영웅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찾았는데 그 이유는 명나라를 높이 세우면서 명나라군을 요청한 자신의 공을 인정해달라는데 있다. 이후 조선 조정은 청조의 감시까지 피해가면서 경복궁 뒤뜰에 대보단을 만들어서 새벽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명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자 청에 대한 반발 심리 역시 적용된 것이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애초에 일본의 조선 침략 명분이 명나라 침략을 위한 교두보 설치 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황제라면 지원군을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당시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나라안에 있는 각종 부정부패에 질려서 파업중이었고
(자기보고 명군이 되라며 엄격하게 가르친 스승 엄거정이 개인적으론 탐관오리였던걸 알아내서
그게 결정타 였다는 연구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제대로 대우해주는 조선을 매우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섬나라 야만인들이 자기가 총애하는 애들 죽인다음 나도 찌를꺼라고 하는 걸 보고 뚜껑이 열려서
매우 막대한 지원군을 보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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