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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12.14

신돈의 만행을 보고도 공민왕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신돈이 권력을 가지고 마음대로 휘두른 면도 있는 것 같은데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인사권을 가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을 임명하고,

최영까지 유배 보냈다고 하는데 이걸 다 보고도 공민왕이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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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1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가의 권위와 지배력은 더욱 약화되면서 또한 홍건적을 평정하는데 앞장섰던 최영과 이성계 등, 강력한 사병조직을 보유한 신흥무인세력들이 성장하여 왕권의 또다른 위협으로 등장했습니다. 또한 1361년에는 공민왕이 누구보다 사랑하고 의지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사망하면서 공민왕은 큰 절망감에 빠졌고 1365년 7월, 공민왕은 돌연 수소문 끝에 7년 만에 신돈을 다시 개경으로 불러들이면서 공민왕은 자신의 최측근 세력으로서 근왕파이면서도 조정을 장악한 권문세족과 무인세력에 맞서 개혁을 단행할 '대리인'이 필요했습니다. 그 역할로 조정에 아무런 기반이 없는 떠돌이승려였던 신돈을 낙점한 것이었고 공민왕은 신돈을 공식적인 왕의 스승으로 임명하며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이자 정책자문을 맡겼습니다. 또한 판검찰사사, 제조승록사사, 판서운관사 등 동시에 7개의 고위 관직을 겸임하게 하는 엄청난 실권까지 부여했고 공민왕으로서는 신돈이 문벌과 귀족, 무인세력들의 저항에도 흔들리지 않고 개혁을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힘을 몰아준 것입니다. 고려에 최초로 승려 출신 정치인이 탄생하는 전무후무한 순간이었고 신돈은 처음에는 공민왕의 파격적인 제안을 거절했다가 신돈은 정치에 뜻이 있었지만 기득권의 반대가 불보듯 뻔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보호막이던 공민왕에게 확실한 신임과 안전보장을 요구했던 것이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공민왕은 신돈의 청에 따라 '다른 사람의 참소에 현혹되지 않을 것을 부처와 하늘앞에서 맹세한다'는 각서까지 써가며 신돈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고합니다. 비로소 공민왕의 제안을 받아들인 신돈은 승려에서 환속하여 세속인으로 돌아왔고 왕의 대리인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움켜쥐게 되어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문벌과 귀족, 무인세력등은 반발했지만 공민왕의 강력한 의지를 꺾지 못했던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민왕과 같은 경우 개혁을 하기 위하여 신돈에게

    많은 힘을 싣어주며 원에서 독립하고자 하였기에

    그런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민왕에게는 태후에 의해서 소개되었는데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그즈음 꾼 꿈에서 자객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꿈에서 자객을 없애준 승려가 신돈이었기 때문이었에 그를 신임하였다고 합니다.

    조금은 어처구니 없죠...

    노국대장공주의 승하 뒤 공민왕이 정치에 뜻을 잃자, 그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정치 전면에 나선다. 이때 그는 법명인 편조(遍照)를 버리고 환속하여, 신돈으로 개명했다.

    공민왕에게 전권을 받은 직후의 직책이 어마어마하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兼)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5]"로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길다.

    그야말로 공민왕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셈이었다. 기본으로 대공신에, 벽상삼한삼중대광(총리도 아니고 부통령급) + 영도첨의사사사(관직 중 최고의 관직으로 본래 공석으로 남겨놓는 명예직) + 판중방감찰사(국방부장관) + 취성부원군(최고 귀족의 명예) + 문화종교부장관 + 농수산부장관 + 기상청장이었던 것이다.

    집권 초창기엔 노비를 풀어주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등 신속하고 공정한 정치로 백성들에게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전민변정도감이 바로 그것.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설치한 기관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부패한 세력들도 몰아냈다.

    하지만 이후 기록을 보면 막장이었다. 사치와 향락, 부정축재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여자에 빠졌다(...) 그리고 야사에 의하면 공민왕과 동성애 관계였다고 한다.고려의 라스푸틴 점점 원래의 개혁의도보단 자신의 권력에 취한 정책을 내놓은 감도 없지 않아 있다.

    또한 공민왕도 서서히 커져가던 그를 견제하였고, 환속한 천출승려 출신에 무엇보다도 부패하고 탐욕하다는 이유로 신진사대부들도 그를 불신하여 결국 사면초가. 심지어 최영마저도 그를 싫어하여 쫓겨나게 되었으니, 사실상 자신과 이춘부 같은 소수의 파당 빼곤 모두가 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사실 그럴 만도 했던게, 신돈 본인은 왕의 신임을 받아 갑자기 출세한 것이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편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안 그러면 자신이 밀려나니까).

    결국 신하들의 간언에 의해 역모죄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1371년 수원에서 처형되었다. 국왕의 신임을 받아 개혁을 진행시키다가 국왕의 총애를 잃고 숙청되었다는 점에서 조광조나 홍국영과 약간은 비슷한 필. 다만 이 숙청은 공민왕의 뜻이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죄목은 반역죄였지만 자기 세력이 없는 신돈이 세력을 모으기도 전에 반역을 저지를 리가 만무하고, 투서가 한 신하에 의해 공민왕에게 전해진 것이 몰락의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심문 한 번 없이 처형됐다. 아무리 반역자라 해도 항변 한 번 들어보지 않고 처형하는 것은 무리수였지만, 공민왕은 전혀 번복하지 않았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민왕은 사랑하는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1365년 죽고나서 슬픔에 빠져 정상적으로 국정으로 운영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공민왕이 혼미한 상황에서 신돈은 영문하부사와 감찰사판사와 서운관판사 등을 겸직하면서 막강한 군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특히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로 권문세족의 반발이 심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