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마항쟁이 발발하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부산으로 급히 내려갔다. 부산과 마산의 상황을 확인하고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김재규는 현황을 조사하고 바로 청와대로 돌아와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보고를 들은 박정희는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 라며 역정을 내었다.
그러자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거들었다.
김재규는 부마 항쟁에 대해 학생은 소수이고 대부분 민간인이어서 '민란'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이는 체제저항과 조세저항에 대한 것으로 5대도시 및 전국 도처에까지 확산할 것으로 보았다. 반면 박정희는 '신민당의 조종'에 무지한 몇몇 시민들의 지각없는 행동으로 매도하였다. 여기에 차지철이 동참하여 '자국민 학살'의 뜻을 내비쳤다.
결과적으로 부마항쟁은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부산은 10월 18일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마산도 18일부터 군부대가 투입되어 시민들을 닥치는대로 검거하였다
부마항쟁이 발발하고 10일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를 벌이는 도중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가슴과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재규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독재자 박정희를 처단하였다고 변론하였지만, 1980년 5월 24일 사형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