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3.05.01

조선시대에도 도서관처럼 책을 빌려 읽을 수 있는 장소가 있었나요?

조선시대에는 인쇄술이 있었으나, 같은 책을 많이 만들 수는 없었을텐데요. 그러면 하나의 책을 여러명이 봐야할 수 있었을텐데, 그러면 도서관 같은 개념의 공공시설이 있었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의 도서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조에는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문학에 재질이 있는 학자를 선발하여 책을 읽고 질문에 대비하거나 자신들의 사상을 밝힐 수 있는 토론의 장소를 마련하기도 했다. 세종 때 설치된 집현전은 왕실의 학술과 문화정책을 위한 중심기구로서 도서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곳에는 다섯 칸의 장서각(藏書閣)을 짓고, 고금의 경적을 수장하여 그 기능을 도왔다.

    1456년(세조 2)에는 집현전이 혁파되었고, 1463년에 설치된 홍문관으로 그 기능이 이관(移管)되었다. 당시 홍문관 내에 등영각(登瀛閣)이란 장서처를 마련하여 집현전에서 이관된 서적과 새로 인출된 책과 서사관(書寫官)들의 선사본(繕寫本) 및 화원이 제작한 화첩, 왕의 재가를 얻어 연경에서 구입한 서적 등을 소장하였다.

    정조조에는 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척리와 환관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학식 높은 학자들을 모아 통사(統史)를 토론하게 하고 정치의 득실을 살피는 한편, 문교의 진흥책으로 설립된 규장각(奎章閣)이 있었다. 정조는 집권하자마자 창덕궁 후원 연못 북쪽에 2층의 누각을 지어 1층은 어제존각(御製尊閣), 2층은 주합루(宙合樓)라는 이름을 어필로 달았다. 주합루 서쪽 바로 옆에는 서향각(書香閣)을 지어 서재로 사용하였다.

    그 후 1층의 어제존각을 규장각으로 개칭하고 자신의 왕위에 관련된 어진·어제·어필·보책·인장 등을 소장하였으며, 서남쪽에 건물을 새로 지어 이름을 봉모당(奉謨堂)이라 하여 이곳에 역대 선왕의 유품들을 소장하였다. 당초의 서재인 서향각은 이안각(移安閣)으로 개칭하여 주합루와 봉모당의 서적들을 포쇄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서향각에 소장된 책들은 연못 남쪽 건너편에 열고관((閱古觀)과 개유와(皆有窩) 두 채를 신축하여 중국책 만을 골라 소장하였다. 책이 많아지자 이안각의 서쪽에 서고를 하나 더 지어 이름을 서고(西庫)라 하고 우리 나라 책만을 소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서관 [library, 圖書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도서관이었던 집현전은 세종 때 설치되었고, 왕실의 학술과 문화정책을 위한 중심기구로서 도서관의 기능을 가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1년 ‘이왕직 장서각’이라는 이름의 왕실 도서관으로 설립한 것이다.

    왕실 도서관으로 기능하던 규장각이 구한말에 축소되었습니다.


    일반백성들은 도서관 자체를 몰랐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학문을 숭상하는 나라라는 말 답게 여러곳에 도서관이 있었는데 성균관을 비롯한 서원이나 향교에서 책을 보관하고 출판하기도 했으며 진천에는 조선 최대의 민간 도서관인 완위각에는 1만권의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완위각은 일제강점기와 6.25동란을 거치며 제 모습을 잃어버렀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공공 도서관의 개념이 궁궐에 있는 집현전등과 같은 곳이 도서관의 역할을 하던 곳 이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책을 빌려 볼수 있는 민간 도서관은 조선 최대의 민간도서관 완위각(일명 ‘만권루’ : 일만권의 책이 있는 정자)이 있었다고 합니다. 완위각을 세운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1677~1724) 선생이 충북 초평에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지금은 그 모습이 없어 졌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