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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3

과거 조선에서는 마을 놀이로 부모 자식간에도 투석전을 하였나요?

과거 조선에서는 마을 사람들끼리의 놀이로 투석전을 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정말 효를 중시하는 나라에서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 돌을 던져 맞히는 놀이를 하였나요? 그러다가 부모 자식 중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죽으면 어떻게 처리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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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석전(石戰)은 한민족의 민속 놀이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때는 정월 대보름이나 단옷날에 했던 놀이다.

    눈싸움과 비슷하지만 석전(石戰)은 말 그대로 돌(石) 싸움(戰)으로, 눈뭉치 대신 돌멩이를 던진다. 그러니까 전장에서의 피튀기는 투석전을 민간인들이 한 것이다. 보통 인접한 두 마을끼리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직접 마주보고 던지거나 아니면 지형지물을 활용해 상대편 마을까지 밀어붙여 점령하면 승리한다.

    조선시대에 석전으로 가장 유명했던 고장은 안동, 김해, 평양 세곳으로 개중 안동의 석전꾼들은 기록에 이르기를 맨손으로 짱돌을 던지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작정하고 사람 죽이는데 쓰는 전쟁용 줄팔매, 그러니까 투석구로 돌을 날렸다고 한다. 숙련자가 쓰는 투석구는 조약돌조차 시속 140km의 속도로 발사해 중갑옷을 입은 상대도 한방에 골절시킬 수있는 흉악한 물건인 만큼 당연히 전투력이 엄청났다. 안동 석전꾼들은 특히 중무장하여 근접전에 능한 왜인들을 잘 때려잡았는데, 삼포왜란 때 제포에 웅거한 왜구가 차일(가리개)과 방패를 설치하고 조선 관군의 화살을 막으면서 버텼으나 안동 현지 주민들을 데려와서 돌팔매질을 시키니 모조리 개박살났다고 한다.[5] 또한 임진왜란 때는 죽령 방면 방어를 명받은 경상좌방어사 성응길이 긴급소집한 안동 석전꾼들로 안동에 접근하던 일본군 2군 선견대를 격퇴해 사흘 이상의 시간을 벌고 초조해진 가토 기요마사가 길을 바꿔 1군이 통과한 조령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조선 후기의 평양 석전꾼들은 맷집으로 유명했는데, 당장 나무 몽둥이에 방패까지 든 평양 석전꾼들이 터프하게 돌맞으면서 밀고들어오자 서울 석전꾼들이 밀렸다는 내용도 있다. 위장 잠입하여 적 마을에 침투 사보타주를 벌이거나, 상대 마을로 처들어가 집을 부수기도 하고, 부락의 체급별로 다양한 단체전을 벌이기도 하는 등, 군사 작전에 버금갔다.

    한성부(서울) 근교에서는 특히 염천교 패와 애고개 패가 만리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석전놀이 앙숙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기록에 왕왕 석전 부대가 나타나지만, 조총 등 개인화기가 발달하면서 유희 수준으로 내려간다. 그래도 영조 때에도 기록이 보이는 등 꾸준히 나타난다. 조선 전기에는 안동의 석전꾼들이 이름이 높았으나,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평양의 석전꾼이 유명했으며, 돌을 던지면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평양 장정들은 머리에 돌을 맞은 흉터가 없으면 치욕으로 여겼고, 석전에 패해 집으로 도망오면 어머니가 이를 크게 질책하며 석전장으로 돌려보낼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열기가 대단했고 터프했다 하겠다. 소년들도 사내다움이 있어야 한다며 참여가 권장 되었을정도. 석전에 승리한 마을은 석전꾼들이 환영을 받으며 마을로 개선했고, 패배한 마을의 석전꾼들은 마을 밖에서 노숙해야 했다고 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위험한 행위이기에 조선시대 당시에도 여러차례 금지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워낙 뿌리가 깊어 명이 잘 안 먹히다가 20세기에야 일제로 인해 근절되었다. 금지한 명목상의 이유는 치안 안정이지만, 실제로는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원태우 지사의 사례처럼 투석을 통한 독립운동을 우려했다는 이유도 있다. 이후로는 주로 총격전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큐멘터리 '깡패와 건달로 보는 100년'에 따르면 석전꾼들은 정월 대보름에 강을 사이에 두고 돌싸움으로 한 해의 농사를 여는 풍습인 석전에 전문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다. 석전꾼은 범죄자나 거지 등 불량배들이 많았고, 관의 감시를 받았던 이들은 관리들의 동원에 쉽게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반체제적인 독립협회가 집회를 할 때 공권력으로는 해산시킬 수 없었기에 사적인 인력들[7]을 동원하여 해산시켰는데, 이 중에 오강의 석전꾼들이 기록되어 있다. 즉, 석전은 일반적으로 강을 사이에 두고 일어났다는 뜻이다.

    당연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금지다. 했다가는 폭처법은 기본이요 돌멩이를 던지는 것이므로 특수폭행죄도 성립하고, 재수 없으면 소요죄가 적용될 공산이 크며, 사상자라도 나오면 가해자는 폭행치사죄가 적용된다. 대신 현대에는 학교 운동회나 행사 같은 때 돌 대신 콩주머니나 모래주머니를,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박을 향해 던지며 노는 '박터트리기 놀이'를 한다.

    출처: 나무위키 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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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4.23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척석희라는 이름으로 돌싸움이 지속되었는데, 태조 이성계는 직접 척석군을 모집하기도 했다.

    이 척석군은 오늘날 프로선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태종은 하나의 짱돌을 들고 일어난 투석전의 매니아라고 알려져있다.

    태종은 병에 걸려 국정을 미루고 누워 있더라도, 투석전만큼은 보러 놔았을 정도

    였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씩은 아들 세종과 같이 투석전을 같이 관람하기도 했다고 한다.

    단옷날 돌싸움에서 승리한 척석군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주는 한편

    면포, 저화 등을 상으로 주기도 했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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