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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질문쟁이
궁금한질문쟁이23.11.19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 배경은 무엇인가요?

기원전 500년전에 발생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재은

어떠한 배경에서 발생했는지 궁금합니다.

전쟁의 기간과 승자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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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리스 -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전쟁은 499년 이오니아 지역의 반란에 대해 아테네가 개입하면서 일어납니다. 이오니아는 그리스계 여러 도시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특히 밀레토스의 참주인 아리스타고라스가 페르시아의 총독 중한명인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낙소스 원정을 떠납니다. 이 원정은 성공하지 못했고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을 선동해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아케메네스는 오리엔트를 다시 통일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가장 잘 나가는 다리우스 1세 치세였습니다. 페르시아로서는 교역에 중요한 지역이면서도 꽤나 많은 세금을 거뒤들이고 있던 이오니아 지역을 가만히 둘 수 없었습니다. 또 워낙 넓은 땅을 지배하다 보니 복잡한 지역이 많아 빨리 정리하고도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오니아 반란을 아테네가 지원한 것입니다.

    결국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서는 아테네는 언제든 이오니아 지역에서 다시금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 요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492년 아테네를 향한 1차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키지만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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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페르시아는 BC525년까지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BC513년부터 발칸반도 원정을 시작합니다.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점령 후 다리우스왕은 다뉴브 강을 거슬러올라가며 영토를 확장, 이때 트라키아 반도에 주둔하던 아테네 군 사령관 밀티아데스가 페르시아 군의 진격을 막고자 다리를 태웠고 이는 페르시아제국의 왕 다리우스 1세의 분노를 사게 되며 후에 페르시아의 트라키아 공격의 원인이 됩니다.

    BC499년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도시 밀레투스의 정치가 아리스타고라스를 중심으로 여러 소도시들이 연합해 이오니아 반란을 일으키자 다리우스 1세는 이를 먼저 진압하고자 하며 BC 494년 이오니아 소도시들을 모두 점령, 다리우스 1세는 BC492년 함대를 정렬하고 사위 마르도니우스를 사령관으로 하여 그리스 북쪽에 있는 트라키아 원정을 시작, 함대는 헬레스폰트 해엽을 통과, 그러나 함대는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름녀 300척의 전함과 20000명의 군사를 잃었다고 하며 이것을 제 1차 페르시아전쟁이라 합니다.

    BC490년 페르시아 제국은 제 2원정에 들어가는데 다리우스 1세의 형제 아르파페네스와 장군 다티스는 실리시아 군을 주력부대로 하는 대군을 이끌고 아티카와 에레트리아 시를 공격, 그 명분은 이오니아 반란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키클라데스 제도 연안을 따라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를 공격해 이를 함락, 이어 아테네 북종쪽에 있는 마라톤 평야에 상륙, 아테네를 공격합니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하나 스파르타는 종교행사를 이유로 파병을 지체, 아테네는 1만 명 본군과 프라타이아에서 온 1천명의 지원군으로 페르시아 군과 맞섰으나 아테네군은 중장병 밀집대전술로 페르시아 승,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공략을 단념하고 스니온 곶을 돌아 귀국합니다.

    전쟁 패배 후 다리우스 1세는 다시 그리스 원정을 준비, 그러나 BC 489년부터 수년간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반란이 지속되어 원정이 연기, 다리우스 1세의 사망으로 아들 크레르크세스가 그 뒤를 이었고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와 물자를 모아 진격하나 유례없이 큰 규모로 인해 진군 속도가 느려 그리스군은 그 동안 충분한 방어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30개 그리스 도시국가가 참여한 동맹이 결성, 육군은 스파르타가, 해군은 아테네가 지휘권을 맡았습니다.

    그리스군은 테르모필레의 협로에 7천명의 병력을 아르테미시움에 271척의 전함을 배치하고 페르시아군을 맞았고 페르시아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선교를 걸고 아토스 곶에 운하를 판 뒤 BC480년 8월 해륙 양면에서 그리스를 공격,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중부 그리스로 가는 중 테르모필레의 협로를 지키나 내통자가 생겨 돌파당해 전원 전사합니다. 그러나 해전에서 양측 모두 해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승패가 쉽게 결정되지 않았고,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대함대건조 제안을 채택해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대비,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 함선에 탈 것을 설득, 아테네 전면의 살라미스 검과의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싸워 이겼고 크세르크세스는 곧 귀국해 마르도니우스에게 자기의 뒤를 잇도록 합니다.

    BC 479년 마르도니오스는 플라타이아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싸워 패, 같은 해 그리스 함대가 소아시아의 미칼레전투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하하며 세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모두 실패,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페르시아의 원정을 맞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잘 싸웠으나 그리스의 도시 중 페르시아에 항복한 도시도 있었고 아테네 안에서도 페르시아와 내통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BC480~BC479년 그리스군의 총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스파르타였으나 그 후 아테네가 대신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쥐고 있다가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며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습니다.

    마라톤에서는 중산시민이 중장보병으로 활약, 살라미스에서 무산대중이 수부로서 활약해 정치적 발언력이 그들에게까지 미쳐 아테네의 민주화를 촉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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