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밀려 에도로 쫓겨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쇼군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권력을 잡은 건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센고쿠 시대 미카와 지역의 영주였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안에 들어가는 등의 일을 거치며 착실하게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오다 사후 떠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켰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히데요시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등을 일으킬 때 조용히 몸을 사리며 세력을 기르다가 그의 사후에 히데요시의 세력들을 상대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긴 뒤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승리
히데요시가 ‘가라이리(중국 입성)’를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 이에야스는 규슈 나고야 성에 머무르며 조선에 출진하지는 않았다. 후일 조선과 외교관계를 재개하고자 할 때 일본 측에는 이 점을 내세웠다. 히데요시의 말년에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정권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5대로(五大老)의 필두로 활약했으나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1595년에 다이묘 간 혼인을 금지한 히데요시의 지시를 깨고 다테 마사무네, 그리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혼인관계를 맺어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이로 인해 이에야스의 행동을 비난하는 다른 네 명의 대로(大老)와 도요토미 정권의 행정실무 최고 담당자인 5봉행(五奉行)의 필두격인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당시 히데요시 가신단은 무단파와 문치파로 갈라져 대립했다. 가토 기요마사로 대표되는 무단파는 독립적 성향의 영주로서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로 대표되는 문치파는 행정관료적 성향이 강해 도요토미 정권이 이룩한 중앙 기구에 권력이 집중된 정치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영주 계급의 독자적 이익 추구라는 면에서 미쓰나리보다는 이에야스와 통하는 점이 있었다. 히데요시 가신단이 둘로 분열된 것은 이에야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1600년 10월, 지금의 기후 현에 위치한 세키가하라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기요마사 등은 미쓰나리의 서군을 적대시하고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미쓰나리는 서국의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내세웠으나 데루모토는 오사카 성에 머무르고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더욱이 서군의 주력이었던 히데요시의 조카 고바야카와 히데요키가 배신하여 서군의 측면을 갑자기 공격했다. 이로 인해 일거에 전열이 무너진 서군은 궤멸되었고 전투는 동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이에야스는 사실상 패권을 확립했지만 세키가하라에서의 승리는 무단파 도요토미 가신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에야스는 곧바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제거하지 못하고 좀 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토 기요마사 등은 평소 사이가 나쁜 미쓰나리를 제거하는 전투에는 참가할 수 있지만,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친다면 여기에는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히데요시의 흔적을 지우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야스는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인내의 화신이란 이에야스의 이미지가 만들어지지만 이처럼 실제로는 어쩔 수 없이 ‘인내’한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쇼군 서임과 오고쇼 시대
1603년 이에야스는 고요제이 천황에게서 쇼군으로 임명받고, 1605년 쇼군직을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다. 이를 통해 히데요시의 아들이 다시 무사 수장으로 될 가능성이 사라졌음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에야스 자신은 오고쇼(물러난 쇼군)가 되어 1607년 슨푸에 머무르며 조정 · 사사와 관련된 문제, 외교 및 화폐와 교통 등 전국적인 정책을 다루고, 일상적인 정치는 에도 막부에서 처리하게 했다. 이를 오고쇼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이에야스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니고, 노부나가도 자신의 직위를 적자인 노부타다에게, 히데요시도 조카 히데쓰구에게 물려주고 실권을 행사한 사례가 있었다.
1611년에는 오사카 성에 있던 히데요리를 교토 이조 성으로 불러 회견했는데, 이 의례를 통하여 히데요리가 이에야스의 휘하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회견 직후 서국 다이묘에게 3개조 법령을 지시하고 이를 준수한다는 맹세문을 제출하도록 했다. 이에야스는 혹시 모를 반항의 싹을 완전히 뿌리 뽑고자 했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노려 카이 (甲斐), 시나노 (信濃)의 다케다 신겐 과 연합, 이마가와를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분할하여 도토미 (遠江)는 마츠다이라 가문, 스루가 (駿河)는 다케다 가문에 속하게 되었다. (1568) 이때 이에야스는 거성을 도토미의 하마마츠로 옮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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