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극심한 가뭄에 시달린 대한제국은 농민들이 유랑하게 됩니다. 이때 나라가 어려운 상황이니 고종의 주치의 선교사 알렌이 고종에게 하와이로 백성들을 보낼 것을 제안합니다. 이민의 뜻은 풍족한 곳으로 간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하와이 일대는 플랜테이션 큰 농장 열대 아열대 지역에서 대규모로 경작하는 농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대한인국민회가 1912년 하와이에 건물을 구입하여 독립운동을 합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비자발급이 어렵게 되자 대한인국민희가 비자발급 이민자처리 등의 업무를 하면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습니다. 해방 전까지 독립운동 자금 300만 달러를 임시정부에 송금하였습니다.
하와이 이민의 역사는 1903년에 도착한 102명의 사탕수수 농장 한인 노동자 이민에서 시작합니다. 이후 이주 한인들이 늘고 한인 사회를 형성하여 1097년 무렵까지 20개 이상의 항일 운동단체가 결성됩니다. 1905년 을사늑약와 1907년 헤이그 특사 이후 24개 단체의 대표 30면이 호놀롤루에 모여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여 1907년 1000여명의 회원이 참여하여 한인협성협회로 통합됩니다. 이후 1909년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와 통합하여 국민회를 창립하고 1910년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합니다. 또한 1914년 박용만은 독립군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하와이는 미주 한인 독립 운동의 근원지이며, 이후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합니다.
하와이에서는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가 통합해 1909년 재미 한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게되었고 이 대한인국민회가 1912년 하와이에 건물을 구입해서 독립운동을 합니다. 1910년 한일합병되면서 대한인국민회는 비자발급, 이민자 문제 처리등 영사관 역할을 자처했으며 이렇게 하와이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습니다. 해방 전까지 독립운동 자금 3백만달러를 임시정부에 송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