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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한하늘소43
소탈한하늘소4323.05.12

작곡가 홍난파가 친일파라는게 사실인가요?

작곡가 홍난파가 친일파이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가 되어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게 사실이라면 음악시간에 고향의봄을 부르는것도 잘못된것 아닌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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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2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37년 ‘동우회(同友會) 사건’을 전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하고 친일단체에 가입하였다. 1937년 5월 친일문예단체인 조선문예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 미국 유학 중에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치렀다. 9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하고 조선문예회가 후원한 ‘바오딩[保定] 함락 축하 황군감사 대음악회’에서 자신의 작곡작품인 「정의의 개가」와 「공군의 노래」를 발표하였고 2부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10월 경성고등음악학원이 주최하고 경성군사후원연맹과 경기도군사후원연맹이 후원하는 ‘음악보국대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고 출연자 수익금 모두를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국방헌금에 헌납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달인 10월 ‘동우회 사건’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11월 자필로 쓴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여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입한 것을 후회하며 일제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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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파라는 획일적 잣대로 한 예술가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홍난파의 곡들은 나라 잃은 민족의 애환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친일 성격과는 무관한 곡들입니다.

    홍난파는 말년에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의 국내지부인 수양동우회 관련자로 피검,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쓰고 풀려났습니다. 이후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 조선문예회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 국민총력조선연맹 ․ 조선음악협회 등에 가입해서 정의의 개가 ․ 공군의 노래 ․ 희망의 아츰 등 친일가요와 “지나사변과 음악”같은 친일논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친일활동의 배경에는 일제의 탄압이라는 측면도 있었던 것입니다.

    홍난파가 겪었던 고초를 다루는 글을 소개합니다.

    “총독부는 홍난파가 근무하던 이화여전 ․ 빅타축음기회사 ․ 경성보육학교를 차례로 그만 두게 했고, 사상전향을 위해 70일 이상 감옥에 가두어 고문을 했다. 그것은 미국 유학시절 자동차 사고로 얻은 건성늑막염을 재발시켜 44세의 일기로 사망케했다.”

    “홍난파의 경우, 1937년 6월 11일 경성에서 일경에 체포, 구속되어 8월 21일 송치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4일에 석방됐다. 이와 관련해서 1937년 7월 1일에 태어난 홍난파의 둘째딸 홍정임은 “제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던 날 저의 아빠는 종로경찰서에 갇히셔서 옥고를 치르고 계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아빠가 안 계신 저는 임자 돌림에 정축년에 태어났다고 정자를 붙여서 정임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드나드시면서 아버지께 흰옷을 넣어드리는 어머니는 번번히 피투성이가 되어 나오는 아버지의 옷을 받아들면서

    …<중략>…

    감옥살이에 시달리신 저의 아버지는 ‘늑막염’이라는 병을 재발시키면서 72일만에 석방이 되셨습니다. 석방을 시킨다는 조건부로 ‘일본에 협조한다는 글과 곡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압력에 시달리면서 한 두 차례 일본에 협조하는 글을 쓰셔야 했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홍난파는 1937년 6월 11일부터 8월 21일까지 적어도 70일 이상 감옥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물먹이기와 비행기 태우는 학춤, 꿇어 앉히기 등의 고문을 홍난파 역시 당했을 것이며, 그 결과 사인(死因)인 건성늑막염이 재발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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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홍난파는 친일파 - 울산저널i

    usjournal.krhttp://usjournal.kr › news › newsview

    2021. 4. 20. — 홍난파친일 행적에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수양동우회' 사건입니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단체로 이광수, 주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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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난파는 모리카와 준으로 창씨개명하고 일제에 아첨하는 음악을 작곡했으며 1941년 1월 11일 친일단체 조선음악협회의 결성대외에서 평의원에 선출, 1월 29일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에 선임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 2009년 11월 홍난파의 행적에 대해 수록했으나 대통력 직속 산하기관인 친일진상규명위원에서 홍난파가 자의적으로했는지 타의적으로 했는지 좀 더 따져야 한다면서 보류처리했으나 2010년 11월 홍난파의 후손 이 홍난파를 친일인사에서 제외해달라며 낸 소송을 돌연 취하함에 따라 등재되었습니다.

    그의 친일행적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으며 보수적 양악계에서는 친일을 하지 않았으면 작품 활동은 물론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며 옹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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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실입니다.

    보수적인 양악계에서는

    “친일을 하지 않았으면 작품활동은 물론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며

    옹호론을 주장하지만, 글쎄올시다.

    생활고와 각종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굽히지 않은

    예술가들, 독립운동가들의 생활과 비교해 보면 개인적으로 판단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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