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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11

12 12 사태는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요

오늘은 12월 12일 12 12 사태가 일어났던날이잖아요 요즘에 이걸 배경으로 한 서울에 봄이라는 영화가 인기가 많다고 하는데 12 12 사태 는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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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반란으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으로 강제 연행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1979년 10ㆍ26사건을 계기로 하여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ㆍ26사건 수사에 비협조적이라고 하여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습니다.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없이 진행되었고, 사후 재가를 받기 위하여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에게 강압적으로 정승화 총장 연행의 재가를 요청하나 거절당합니다. 이에 맞서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노재현에게 대통령을 설득하도록 하여고 마침내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 세력은 제5공화국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신군부 세력은 권력의 요직을 차지했고,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었으며,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실시하여 국가권력을 탈취했고 그 다음날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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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견실한시라소니109
    견실한시라소니10923.12.12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2.12 사태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반란을 말하며 위 전두환 등은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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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9년 12월 12일 군부의 실세였던 전두환, 노태우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반란 사건으로 이들이 이끈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의 재가 없이 휘하 부대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 육군찬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후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 정승화는 군 장악을 위해 윤성민 , 장태완, 정병주 등을 중용해 지휘계통을 개편하고 10.26사태에 직접 연루되었던 중앙정보부와 대통령 경호실을 축소 개편합니다.

    이로써 정승화는 군에 대한 지휘체계를 확보하고 자신이 정치 일정을 이끌어 가는 데 핵심역할을 담당하려 했는데 하나회가 4년제 육군사관학교 최초의 기수인 11기의 지도 아래 하나의 배타적인 파벌집단을 형성하면서 군부내 세력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보안사령관의 자격으로 10.26사태에 대한 수사를 전담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군부세력이 기존의 육군지도부였던 정승화 세력과 갈등, 갈등을 일으키게 한 대립의 쟁점은 사건수사와 군의 인사문제였습니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승화가 김재규의 내란에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 10.26사태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합니다.

    10.26사태 당시 정승화는 궁정동 안가의 대통령 시해현장 부근에 대기, 사건 이후 김재규를 구속할 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그 수사를 지연시킨다는 의혹을 불렀습니다.

    정승화의 연행을 실행하기 위해 11월 중순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합니다.

    12월 초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 전두환 합수부장의 지시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 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제 33헌병대 병력 65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해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해 제압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합니다.

    윤성민 육군참모총장 지휘하의 육군 수뇌부는 이 사실을 확인해 전군에 비상을 발동하고 합동수사본부측에 정승화의 원상회복을 명령하나 거절, 이미 1공수여단과 5공수여단 병력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고 9사단 병력 등은 중앙청으로 진입하였으므로 진압군 병력 출동을 추진하던 육군수뇌부는 모두 서빙고 분실로 불법 연행됩니다.

    이와 같은 반란군의 정승화 연행과 병력이동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뤄졌는데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해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해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나 거절,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규하에게 정승화가 김재규와 연루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으니 정승화를 연행 조사토록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후일 김재규에게 받은 돈 300만원은 단순한 추석 촌지로 당시 전두환도 500만원 수령 사실을 인정했었다고 주장,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데 실패한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해 그를 통해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합니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 당시 군부가 반란의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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