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만력제는 어떤 황제였나요?
'명나라는 만력제 때문에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만력제는 명나라 최고의 암군이라고 하는데요.
어떤 황제였길래 후대에 이런 평가를 받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력제는 정치를 잘 알지 못했던 등극 초기에는 모든 일을 재상 장거정에게 맡겼고 오랫동안 그의 스승이었던 인연 때문이었다고합니다. 장거정의 교육 방식은 너무 엄격해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조이기 일쑤였으며 공론을 줄이고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을 중시한 그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 없이,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했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덕분에 명나라는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만력제가 제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던 해 장거정이 세상을 떠났고 그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반대파들은 입을 모아 장거정의 비리를 들추며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장거정을 편들었던 만력제도 그의 재산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장거정의 가산을 몰수했으며 이후 그는 30년 간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져갔고, 나라에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 닢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갔다고합니다. 반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고 황제 개인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늘어 갔으나 국고는 점점 줄어들었으며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치부에만 열성을 보였다고합니다. 그리고 거기다 술과 여자까지 밝혔다고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 신종 만력제는 명나라의 제 13대 황제입니다. 융경제의 3남입니다. 1572년-1620년까지 48년간 재위하였습니다. 만력제는 정치를 잘 모르던 초기에는 장거정에게 맡겼습니다. 오랫동안 그의 스승이라는 인연때문입니다. 장거정의 교육방식은 너무 엄격해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조이기 일쑤였습니다. 공론을 줄이고 명실상부 기강확립 명령복종 군비확충 등을 중시한 그는 철혈재상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였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만력제가 제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던 해 장거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력제는 장거정 사후 여러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해왔으나 장거정의 재산이 자신보다 많다는 보고에 가산을 몰수하였습니다. 이후 만력제는 30여년간 정사를 돌보지 않고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잎 내놓지 않았으며 반면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였습니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하는 탐관오리가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없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히고 오로지 치부에만 열성이었고 거기에 술과 여자까지 밝히게 됩니다. 만력제 사후 3명의 황제가 뒤를 이었으나 이미 명나라는 만력제 때부터 기운이 다한 것으로 민심이반이 나타났고 이자성의 난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덕제가아니라 만력제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력제는 상소 등을 거부하고
위와 더불어서 관료들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보이며
후계문제에 있어서도 명확하지 못하며 여색을 상당히
밝혔기에 암군으로 꼽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불어 궁녀와 환관을 엄청나게 죽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 명(明)의 제13대 황제로서 이름은 주익균(朱翊鈞), 묘호(廟號)는 신종(神宗)이다. 재위(在位) 때 만력(萬曆, 1573~1620)이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여 만력제(萬曆帝)라고 부른다. 1563년 9월 4일 융경제(隆慶帝, 재위 1567~1572)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生母)는 귀비(貴妃) 이씨(李氏)이다. 위로 두 형이 있었지만 일찍 죽어 여섯 살 때인 1568년 황태자가 되었으며, 1572년 7월 융경제(隆慶帝)가 황위(皇位)에 오른지 6년만에 죽자 10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뒤 1620년 8월 18일 죽을 때까지 명(明) 왕조(王朝)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48년 동안 황위(皇位)에 있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만력제(萬曆帝)는 즉위 초기 10여년 동안은 선제(先帝)의 뜻에 따라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 1525~1582)에게 정무(政務)를 맡겨 내정(內政) 개혁을 추진하였다. 장거정은 고성법(考成法)을 실시하여 관리가 상주(上奏)하여 황제의 재가를 얻은 사안의 집행 여부를 달마다 보고하도록 하여 행정 체계의 효율성을 높이고 기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리고 새로 전국의 농지를 측량하고, 이에 근거하여 각종 조세와 요역을 통합하여 은(銀)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하였다. 또한 몽골 타타르[韃靼]에 대해 화평(和平) 정책을 추진하고, 척계광(戚繼光, 1528~1587)과 이성량(李成梁, 1526~1615) 등을 중용하여 왜구(倭寇)나 몽골, 여진(女眞)의 위협에 대한 국방(國防) 체계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개혁 정책은 명(明)의 정치적 안정에 크게 기여하여 이른바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고 불리는 사회와 경제,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 시기에 명(明)은 이른바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외환(外患)을 극복하고, 국가 재정(財政)을 크게 확충하였다.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해외 무역도 확대하여 은(銀)의 유입이 크게 늘면서 명(明) 문화의 최성기(最盛期)를 가져왔다.
하지만 1582년 장거정(張居正)이 죽고 만력제(萬曆帝)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면서 개혁 정책의 후퇴가 나타났다. 장거정은 탄핵되었으며 고성법(考成法)은 폐지되었다. 특히 1586년(萬曆 14년) 이후 만력제(萬曆帝)가 황태자의 책봉 문제로 내각(內閣)과 대립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는 ‘태정(怠政)’을 지속하면서 명(明)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만력제는 황귀비(皇貴妃) 정씨(鄭氏)를 총애하여 장자(長子)인 주상락(朱常洛, 1582~1620) 대신에 정귀비가 낳은 셋째 아들 주상순(朱常洵, 1586~1641)을 황태자(皇太子)로 삼으려 하였다. 내각(內閣) 대신(大臣)들이 종법(宗法)의 원칙을 내세워 이에 반대하자 만력제는 1589년 이후 30여년을 조정(朝廷)에 나오지 않고 정무(政務)을 내팽개치는 태정(怠政)을 하였다. 대신(大臣)들도 몇 년 동안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신료(臣僚)들의 상주문(上奏文)은 회답이 없이 궁중에 방치되었다. 고위 관직이 비어도 후임자를 제대로 임명하지 못해 내각(內閣)이나 지방 관청의 상당수가 관리가 제대로 충원되지 못해 업무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게다가 만력제(萬曆帝)는 국가 재정을 무시하고 개인의 축재(蓄財)에만 힘을 쏟아 1596년(萬曆 24년)부터 환관(宦官)들을 광세사(鑛税使)로 파견하기 시작해 백성들의 원성(怨聲)을 샀다. 광세사(鑛税使)로 파견된 환관(宦官)들은 지하에 광맥(鑛脈)이 있다는 것을 알면 채굴(採掘)을 위해 그곳에 있는 백성들을 모두 몰아냈다. 그리고 채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근의 상인들에게 도광(盜鑛)의 책임을 물어 배상을 강요했다. 광세사(鑛税使)들은 상인과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하였고, 환관의 발호(跋扈)가 나타나면서 환관과 내각 사이의 당쟁도 격화하였다. 광세사(鑛税使) 파견은 명(明) 시대에 나타난 대표적인 악정(惡政)으로 꼽힐 만큼 백성들의 반감을 샀지만, 만력제(萬曆帝)는 재위 기간에 광세사(鑛税使)의 파견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모아들인 돈을 왕실 재정인 내탕[內帑]에 두고 개인적인 사치로 낭비하여 더욱 백성들에게 원성(怨聲)을 받았다. 심지어 1618년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가 이끄는 후금(後金)의 군대가 푸순[撫順]을 점령하자 병부상서(兵部尙書) 설삼재(薛三才)를 비롯한 대신들이 랴오둥[遼東] 방어를 위한 군비(軍費)가 모자라 내탕(內帑)에서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만력제(萬曆帝)는 이조차도 거절하였다.
만력제(萬曆帝)의 태정(怠政)으로 명(明)은 매우 빨리 몰락하였다. 황태자의 책봉 문제를 둘러싼 내각(內閣)과 황제의 대립은 정치적 불안정과 당쟁의 격화를 가져왔으며, 환관(宦官) 세력이 발호(跋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592년 닝샤[寧夏]에서 일어난 발배(哱拜)의 난(亂)과 1594년 쓰촨[四川]과 구이저우[貴州]에서 일어난 양응룡(楊應龍)의 난(亂), 1592년 조선(朝鮮)에서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 등에 대규모로 군사를 파견하였는데, 이른바 ‘만력3정(萬曆三征)’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들은 명의 국가 재정을 크게 악화시켰다. 이러한 명(明)의 정치적 혼란은 후금(後金) 세력이 강성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누르하치[努爾哈赤]는 1619년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명(明)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명(明) 조정(朝廷)은 웅정필(熊廷弼, 1569~1625)을 파견하여 랴오둥[遼東]의 정세를 안정시키려 하였지만, 결국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농민반란과 후금(後金)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1644년에 멸망하였다.
만력제(萬曆帝)는 1620년 8월 18일 죽어 정릉(定陵)에 안장되었고,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정릉(定陵)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시기에 홍위병(紅衛兵)들에게 파헤쳐졌고, 만력제(萬曆帝)의 유골이 소각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명사(明史)> 등의 사서(史書)에서 만력제(萬曆帝)는 명(明)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를 받아왔다. 만력제(萬曆帝)가 태정(怠政)을 한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타난다. 그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이었고, 등과 다리가 굽은 신병(身病)을 앓아 움직이기를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 1958년 정릉(定陵)의 발굴이 이루어져 만력제(萬曆帝)의 유골이 복원되었는데, 상체가 심하게 굽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그가 아편 중독에 빠져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어려서 총명함을 보였던 그가 장거정(張居正)이 죽은 뒤에 급격히 정무를 게을리 한 사실을 두고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인물을 잃음으로써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력제가 후대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1582년 장거정이 죽고 만력제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개혁정책의 후퇴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장거정은 탄핵되었고 고성법은 폐지, 1586년 이후 만력제가 황태자의 책봉 문제로 내각과 대립하며 정사를 돌보지 않는 태정을 지속했으므로 명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으며 황귀비 정씨를 총애해 장자인 주상락 대신 정귀비가 낳은 셋째 아들 주상순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내각 대신들이 종법의 원칙을 내세워 이에 반대하자 만력제는 1589년 이후 30여 년을 조정에 나오지 않고 정무를 내팽겨치는 태정을 했으며, 대신들도 몇년동안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신료들의 상주문은 회답이 없이 궁중에 방치되기도 했습니다.
고위 관직이 비어도 후임을 제대로 임명하지 못해 내각이나 지방 관청의 상당수가 관리가 제대로 충원되지 못해 업무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국가 재정을 무시하고 개인의 축재에만 힘을 쏟아 1596년부터 환관들은 광세사로 파견하기 시작해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했습니다. 광세사로 파견된 환관들은 지하에 광맥이 있다는 것을 알면 채굴을 위해 그곳에 있는 백성들을 몰아내었고 채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않으면 인근의 상인들에게 도광의 책임을 물어 배상을 강요, 광세사들은 상인과 백성들을 약탈했고 환관들의 발호가 나타나면 환관과 내각 사이의 당쟁도 격화했습니다. 광세사 파견은 명시대에 나타난 대표적인 악정으로 꼽힐 만큼 백성들의 반감을 샀으나 만력제는 재위 기간 광세사의 파견을 중단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렇게 모인 돈을 왕실 재정인 내탕에 두고 개인적인 사치로 낭비하여 백성들에게 더 큰 원망을 샀습니다. 1618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의 군대가 푸순을 점령하자 병부상서 설감재를 비롯한 대신들이 랴오둥 방어를 위한 군비가 모자라 내탕에서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나 이도 거절합니다
결국 만력제의 태정으로 명은 빠르게 몰락, 황태자의 책봉 문제를 둘러싼 내각과 황제의 대립은 정치적 불안정과 당쟁의 격화를 가져왔고 환관 세력이 발호하는 계기가 됩니다.
1592년 닝샤에서 일어난 발배의 난과 1594년 쓰촨과 구이저우에서 일어난 양응룡의 난, 1592년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 등 대규모로 군사를 파견하는데 만력 3정이라 불리는 이 사건들은 명의 국가 재정을 크게 악화시켰습니다.
이런 명의 정치적 혼란은 후금 세력이 강해지는 계기가 되고 누르하치는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명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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