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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무
수리무23.12.20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전국을 통일했다는데 그전에는 통일국가가 아니었나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에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데

당시 일본이 천황이 다스리는 통일국가가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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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은 그 전에도 천황을 중심으로 한 통일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천황의 권위가 극도로 약해지고, 무로마치 막부 시대 중후기에 들어서 오닌의 난으로 쇼군이 수장인 막부의 권위까지 바닥으로 치닫자 다이묘라고 불리우는 각 지역 영주들과 사무라이들이 저마다 자신이 최고가 되겠다며 가문의 이름으로 싸우는 전국적으로 혼란한 시기가 도래하였습니다 이것을 전국시대라고 하고 일본어로 센고쿠 시대라고 합니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 중심의 오다 가문,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심의 도쿠가와 가문, 타케다 신겐이 이끈 기마전투에 능한 타게다 가문이 가장 이름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의 통일은 오다 가문을 통해서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타케다 신겐이 이끄는 타게다 가문을 정복하였고, 그에 뒤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전투에서 호죠 가문을 물리치면서 사실상 전국시대의 끝이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간의 패권 다툼이 암암리에 있었기에 전국시대라기 보다는 암투의 시대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입지는 그렇게 독보적이지 않았습니다. 평민 출신 등의 기반이 약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강력한 위협세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도전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자신들의 내치를 다지기 위해 선택한 것이 조선을 침공하는 임진왜란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것을 통해 조선을 거쳐 중국에까지 진격한다는 생각으로 전 병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고, 일본 내부가 전쟁으로 하나가 되고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지기를 원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최종적으로 일본의 패배로 마무리 되었고, 전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여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에도 막부가 수립됩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화친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고, 반대편을 모두 숙청, 멸문지화시킵니다. 이후 오사카 겨울/여름 성전을 통해 완전한 일본 통일을 이루어냅니다.

    그런데 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단한 것은 이전 막부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책들을 잘 이어받고 발전시켜 국내를 안정시키고 일본을 오랫동안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하는 꼴과는 사뭇 다르니 이 부분은 일본에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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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은 4세기 무렵 출현한 야마토(大和)이 통일을 이룹니다. 그런데 12세기 미나모토 막부를 설치부터 일왕은 상징적인 존재이고, 실질적으로는 막부의 쇼군이 통치합니다. 그런데, 무로마치 막부 말기 중앙 정부의 권위가 서지 않아 지방 다이묘들이 서로 다투게 됩니다. 이 시대를 센고쿠 시대라 합니다.(15세기 중반~16세기 말)

    군웅할거의 계기가 된 것은 오닌의 난이 발발한 1467년경 센고쿠 시대의 시작으로 보며, 종말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쫓겨나 무로마치 바쿠후가 멸망한 1573년경으로 보는 주장도 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한 1590년으로 봅니다.

    질문에서 일왕이 다스리는 통일국가는 사실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쇼군이 다스리는 막부 체제인데, 센고쿠 시대는 막부의 약화로 지방 다이묘들 사이의 대립으로 일시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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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천황은 나중에 생겼고 당시에는 쇼군들이 있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일본을 다스리고 있었어요.

    후계자 때문에 고민한 아시카가 요시마사1449년부터 1473년까지 쇼군으로서 일본을 다스렸다. 정치보다는 문화 예술에 관심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요시마사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어요. 그 때문에 요시마사는 동생 요시미를 쇼군의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으로 정했어요. 그리고 관령(쇼군을 보좌하는 직책)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후견인으로 정했지요.

    그런데 이를 어떻게 할까요? 뜻밖에도 이듬해 요시마사의 부인 히노 도미코가 아들 요시히사를 낳았어요. 도미코는 자신의 아들이 쇼군이 되길 원했지요. 그래서 야마나 소젠을 후견인으로 삼아 호소카와 가쓰모토에 맞섰어요. 후계자가 되면, 엄청난 땅과 지휘권을 갖게 되기 때문에 서로 한 발도 양보할 수 없었답니다.

    결국 이 후계자의 문제를 놓고, 양쪽은 무려 11년 동안이나 여러 지방의 지배자인 슈고 다이묘들과 무사들을 끌어들여 치열하게 싸웠어요. 쇼군 요시마사가 전쟁을 멈추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이 일을 두고 ‘오닌의 난’이라고 불러요.

    결국 1477년이 되어서야 난리가 수그러들었어요. 하지만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교토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어요. 사찰은 물론이고, 천황과 귀족들의 집이 불탔고, 문화재까지 부서졌어요. 뿐만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와 쇼군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지요. 슈고 다이묘들은 전투를 끝내고 각자의 지방으로 돌아갔지만, 더 이상 쇼군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오닌의 난 이후에는 쇼군보다 땅 많고 힘센 사람이 최고가 되었어요. 여러 세력이 저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어서는 전국 시대가 막을 연 거예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힘을 무시하는 일은 지방에서도 일어났어요. 여러 싸움을 거치면서 스스로 힘을 키운 지방의 세력들은 슈고 다이묘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세력으로 커 나가기 시작했어요. 이들을 센고쿠 다이묘라 부르지요.

    “누구의 땅이든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면 된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그렇게 외치며 땅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였어요. 서로 뭉쳤다가 배신하기를 반복했지요.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땅을 두고 싸움을 벌였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센고쿠 다이묘들은 땅과 농민을 손아귀에 넣고 경제력을 키워 나갔어요.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고, 불안한 날들이 계속 이어졌어요.

    그러던 1543년, 포르투갈의 배 한 척이 폭풍우를 만나 일본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까지 떠내려 왔어요. 이때, 이 지역의 영주 다네가시마 토키타카는 서양 사람이 가지고 있던 총을 사들였어요. 그리고 가까운 부하들에게 총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했어요.

    총은 전국에 퍼져 나갔어요. 이즈음에는 한참 센고쿠 다이묘들이 서로 다투고 있던 때라 앞다투어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려 했지요. 이 때문에 기마병 중심의 싸움은 점차 줄어들고, 성의 구조도 총알을 막기 위한 모양으로 바뀌어 갔어요.

    그런데 유독 총을 잘 이해하고 직접 만들어 내는 데 일찍부터 열을 올린 센고쿠 다이묘가 있었어요. 그는 총을 많이 만들고 조총 부대까지 실제 전투에 나서게 했어요. 옛날 방식의 전투를 단숨에 바꾸어 버린 거예요. 그는 오다 노부나가였어요.

    노부나가는 원래 오하리국 남쪽에 있는 기요스 성의 성주였어요. 그곳은 교통의 중심지였고, 농작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땅이었어요. 훗날 노부나가가 재빨리 조총 부대를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지리적 여건이 한몫을 했지요.

    미쓰히데를 혼내는 노부나가미쓰히데가 배신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뿐이다. 배신한 이유가 노부나가에게 무시당한 원한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결단력이 빠르고 과감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당시의 센고쿠 다이묘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열망이 아주 컸어요. 노부나가는 7년 동안 준비하여 전국의 중심지인 교토에 재빠르게 먼저 들어갔어요.

    그러고는 자신과 반대편에 선 적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지요. 1570년 에치젠의 아사쿠라 씨, 오미의 아사이 씨를 굴복시키고,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를 무찔렀어요. 바로 이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조총 부대를 앞세워 승리를 거두었어요.

    “기병이 공격해 오는 쪽에 장애물을 만들고 그 뒤에 조총 부대를 두어라!”

    이에 약 3천 명의 조총 부대가 당시 최강이라고 알려진 가쓰요리의 기병대를 단숨에 무찔렀어요.

    이어 1580년에는 10년 동안 승부가 나지 않던 정적 겐뇨와의 싸움에서도 항복을 받으며 끝을 냈어요. 그럼으로써 사실상 일본 중앙부의 절반 이상을 손안에 넣었지요. 이제 혼란스러웠던 일본의 전국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는 듯했어요.

    그러던 1582년,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카마쓰 성에서 모리씨와 싸우다가 불리해지자 도움을 청해 왔어요. 이때 노부나가는 급히 달려가 다카마쓰 성에서 멀지 않은 혼노지까지 갔어요.

    그런데 며칠 후 새벽, 자신이 가장 아끼던 부하 중의 하나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공격해 왔어요. 뜻밖의 배신에 놀란 노부나가는 온 힘을 다해 싸웠지만, 준비를 하지 않고 있던 터라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지요. 마침내 오다 노부나가는 패배를 인정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오다 노부나가가 꿈꾸던 전국 통일은 뒤이어 등장한 히데요시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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