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섭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사섭이라는 인물은 삼국지에서는 비중이 많지 않지만 베트남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인물로 다루고 있다고 하는데요.
베트남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하는데 어떤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섭은 고대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손오의 인물이자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교주를 다스린 인물입니다. 중국 최남단(현재의 광둥 성, 광시 자치구, 베트남 북부 및 중부)에 위치했던 교주의 자사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시대 오나라 창오 광신 사람으로 자는 위언 입니다. 젊어서 낙양에 들어가 유자기로부터 춘추좌씨전을 배웠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이 되었는데 어떤일로 면직되었으며 나중에 무재로 천거 받아 거듭 승진하여 교지태수까지 올랐습니다.
한나라 말기 세상이 크게 혼란해졌지만 한 지역을 다스리면서 공직을 충실히 지켜 안원장군에 임명, 건안 말 손권에게 귀부하여 익주의 호강인 옹개가 오나라에 귀순하도록 유도하였고, 위장군으로 옮긴 뒤 용편후에 봉해졌습니다.
성격이 관대하고 후덕했으며 지방관으로 40년동안 있으면서 겸허하게 처신하여 중원의 인사로 피난을 와 의지한 사람이 수백명에 이르렀으며 춘추를 좋아해 주를 달았다고 전해집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한은 3세기가 되면서 재기 불능 상태가 되었고 삼국 시대가 도래하자 베트남에 대한 직접 지배는 고사하고 베트남을 중국 땅의 일부로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이때 베트남을 지배하게 된 사람들은 그동안 베트남으로 이주해 들어온 중국인 실력자들로서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사섭이었다.
사섭의 지배기에 베트남은 몇 가지 면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첫째는, 교지가 대외 교역의 중심지로 크게 부각되었다. 삼국 시대에 베트남에 대한 공식적인 지배권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오(吳)에 있었다. 사섭은 오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의 대리인으로서 베트남을 지배하는 형식을 취했다. 오의 산하 교지 태수라고 하는 공식적인 직함을 갖고 베트남 지배자로 군림한 그는 오가 요구하는 막대한 양의 경제적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사섭은 충실하게 오의 요구를 만족시켰고 교지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지역으로부터 온 상인들로 붐비는 지역으로 발전했다. 3세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부와 남부에 전성기의 참파와 푸난이 있었음을 기억한다면, 사섭의 지배하에서 안정되어 있던 인도차이나 반도 북부의 교지로 교역상들이 찾아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교역상들로서는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서도 교지를 통하는 것이 전쟁에 바쁜 오로 직접 가는 것보다 안전했다.
교역선에는 상품만 실리는 게 아니라 종교적 사명감으로 충만한 사람들도 타기 마련이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퍼지고 있던 대승 불교가 교역선을 통해 전해졌다. 사섭은 이 새로운 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보호했기 때문에 교지에서는 불교가 발전했고, 곧이어 남중국으로 전해졌다.
중국의 불교는 인도로부터 티베트를 거쳐 전래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으나 그것은 북중국의 경우이고, 남중국의 불교는 해상 교역로를 통해 교지를 거쳐 전파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교지에서 활동한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Sogdiana) 출신 승려 강승회(康僧會)가 중국으로 건너가 오의 손권(孫權)을 불교에 귀의시킨 일(247년)은 유명하며, 중국 불교사에서 최초의 저술인 『이혹론(理惑論)』을 쓴 모자(牟子)가 불교를 배운 것도 비슷한 시기에 교지에서였다.
사섭의 지배기 또 다른 사회적 변화는 중국 유학이 크게 퍼졌다는 것이다. 불안정한 중국 내의 정세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베트남으로 이주해 들어왔고,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되어 온 사람들 중에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도 많았다. 사섭이 이들을 보호하고 우대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새로운 땅에서도 지적 탐구의 호사를 마음껏 누리며 학교를 열고 제자들을 배출해 베트남 사회의 수직적, 수평적 유교 문화 확산에 공헌했다.
출처 : 동남아시아사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시대 한나라는 베트남을 점령은 하되 직접적인 통치가 힘들었고 베트남 사람들은 계속 해서 반항적으로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사섭인데 사섭은 중국이 삼국시대 되면서 혼란에 빠지자 사실상의 독립 세력이 되는데, 그는 기존에 무력으로 진압하던 관리들과는 다르게 먼저 현지인들에게 인망을 얻고, 주변의 도적들을 섬멸하고 유학을 전래하고 현재 북베트남 지역의 인프라를 제대로 다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베트남은 평화가 찾아오고, 중원의 전란을 피해 이쪽으로 도망쳐온 여러 지식인들까지 더해지면서 교주는 재화와 문화가 번성한 활력 있는 도시가 됩니다. 사섭은 사왕(士王)이라고 까지 불리며 현지 베트남 인들에게 존경을 받죠.현지의 사정에 밝은 사씨집안 인물들이 계속 이렇게 대를 이어 게속 해나갔다면 말 그대로 문화 사상적 동화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냥 간단하게 끝나버리고 바로 오나라의 손권이 이 지방의 풍부한 재물을 몹시도 탐을 낸 것인데 사섭이 죽자 오나라는 교주를 교주와 광주, 두 개로 분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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