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논과 밭농사 방식과 농서 및 지대 방식이 궁금합니다.
조선 후기 논과 밭농사 방식과 농서 및 지대 방식이 궁금합니다.
외래 작물도 일본과 청나라 통해 들어왔다고 하는데 무엇이 들어 왔습니까?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에 밭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방식은 根耕法과 間種法이 있었다.0065) 근경법이란 밭에 작물을 재배하여 수확하고 난 이후에 곧바로 후속 작물을 재배하여 수확하는 방법으로서 1년에 2번 또는 2년에 3번 작물을 재배하는 형태였다. 예를 들면 9월에 가을보리를 심어 5월에 수확하고 난 후, 그 밭에다 조나 콩 등을 심어서 9월경에 수확하는 방식이었다. 간종법은 밭에서 작물(前作物)이 자라고 있는데, 그 사이에 다시 작물(後作物)을 파종하여 전작물을 수확할 때까지 같이 재배함으로써 1년 2작을 행하는 경작방식이다. 예를 들면 보리밭 사이에 콩이나 조를 심거나, 콩밭 사이에 보리를 심어 재배하여 수확하는 경우나,0066) 목화밭 사이에 참깨나 콩을 심는 경우 등이었다.0067)
물론 이 근경법과 간종법은 조선 전기에도 행해졌지만, 그것이 전면화되는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였다.≪농사직설≫에 의하면 가을 보리를 수확하고 난 이후에 조나 콩 등을 심는 근경법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까지도 근경을 행하여 1년에 2번 경작하는 밭은 1/4∼1/3밖에 되지 않았다.0068) 18세기 이후 근경법이 널리 행해졌고, 19세기에 들어와 일반화되었다. 서유구는 그러한 현상을 “보리를 수확한 후 콩이나 조를 심는데 그것을 근경이라 하며, 근래 농가에서 널리 행한다”0069)라고 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간종법은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밭이 적은 농부가 행하는 방식이었고, 일반적으로 행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근경 못지않게 널리 보급되어 갔다. 특히 경기 이북지방에서는 기후상의 조건으로 말미암아 근경을 실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신 간종법을 통해 2년 3작 내지 1년 2작을 행하였다.
한전의 작부체계는 지역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면 18세기말의 사정을 우하영은≪천일록≫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첫째, 경기의 도성을 경계선으로 하여 북쪽은 밭이 많은 田作지대이고 남쪽은 논이 많은 沓作지대로 대별하였다. 둘째, 작물의 분포상으로 보아 산간지방을 포함하여 도성 이북은 조 중심지대이고, 남쪽은 보리 중심지대라고 보았다. 셋째, 경종방식에서는 함경도가 단작지대,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가 근경작지대, 평안도·황해도·강원도가 간종지대라고 보았다. 넷째, 犁耕法으로는 전작지대는 二牛耕, 답작지대는 一牛耕이고, 답작지대 가운데 경기도·충청도·경상좌도의 산간지방은 二牛耕지대라고 분류하였다.0070)
18세기 이후에도 윤작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근경법과 간종법에 의한 작부체계는 지역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있었다. 즉 작물재배의 조합형태가 달랐는데, 삼남지방에서는「가을 보리와 콩」을 심는 근경작이 지배적이었고, 경기 이북지방에서는 조를 재배하면서 보리를 간작하거나, 보리를 재배하면서 콩을 간작하는 1년 2작의 간종법과 이 두 방식이 결합된, 조를 심고 수확한 후에 가을 보리를 재배하면서 콩을 간작하는 2년 3작이 행해지고 있었다.0071)
또한 채소나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농민은 농사에 열심이어서, 1년에 3번 경작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8세기말에 麻·연초·무우를 윤작함으로써 1년에 3번 경작하여 많은 이익을 얻는 농민이 있었다.0072) 이와 같이 18세기말 이후에는 작물을 여러 번 경작하여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켜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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