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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한하늘소43
소탈한하늘소4323.05.08

마카오는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다는게 사실인가요?

마카오는 예전에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다고 하던데요, 그게 사실인가요? 그러면 마카오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던것인가요? 그리고 마카오가 포르투칼의 식민지가 된 계기는 무엇이였는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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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적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있다가 중국에 반환되었다고 합니다.

    명나라가 포르투갈과 무역하기 위해 마카오를 개항한 것을 "포르투갈인들이 해적을 퇴치한 공로를 명나라 황제에게 인정받아 마카오를 무역항으로 개항하여 명나라와 포르투갈의 무역이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이건 18세기에 포르투갈인이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창작한 이야기다. 사실은 1553년에 포르투갈의 콘키스타도르인 호르헤 알바레스 일행이 "배의 화물이 젖어서 잠깐 말리고 싶다"는 구실로 명나라 군인과 장군, 관리에게 엄청난 금과 뇌물을 주어 체류하게 된 것이 이 도시의 시초이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로 도교빠라 불릴 정도로 신비주의에 탐닉한 가정제는 불로장생에 집착해 채향사(採香使)들을 시켜 방방곡곡에서 용연향을 구하게 했는데, 때마침 전세계에 연락선이 있는 포르투갈 상인들은 용연향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어 황제와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한편 명나라는 언젠가 서양 국가들과도 교류를 하고싶어했는데 이 기회에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기위한 창구로 써먹을 생각으로 무역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1557년부터는 포르투갈 측에선 매년 명나라 황제와 장군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이후 15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에 포르투갈이 매년 500냥을 세금 명목으로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체류를 공식 허용하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연안에 왜구나 중국인 해적들이 들끓어서 국가 제정이 자꾸만 나가고 있어서 짜증이 났었는데 이때의 마카오는 일개 작은 섬에 불과한지라 포르투갈이 매년 거금의 세금을 명나라에게 바치니까 명나라 황제로서는 오히려 땡큐였던 것이다. 그 이후 영구 임대안을 승인했으며 정식으로 임대된 후엔 뇌물이 아닌 정식 임대료, 즉 명나라 황제에 대해 세금을 지불하고 대신 마카오에서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이때만 해도 법적으로 포르투갈에 주권이 이양된 건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국력의 한계[1] 때문에 명나라 본토 침공을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화기로 무장한 대군에게 포위되어 궤멸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마카오 내 중국인들의 처우에서도 드러나는데, 다른 지역 식민지에서는 원주민들을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징집하던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에서만큼은 이런 행동을 자제했다. 마카오의 역사를 다른 여러 문헌에서 지적하는 사실인데, 마카오에 체류하던 포르투갈인이 현지 중국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마카오에 체류하던 포르투갈 군인과 관료들은 당시 노예무역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구입한 일본인 여성을 현지처로 삼거나 아니면 고아(인도)나 믈라카 식민지에서 식민지인 출신 부인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의 노예무역, 고안 카톨릭 및 위백 영어판 마카오인 문서# 등등 참조.

    마카오의 전성기는 1580년에서 1640년 사이 스페인 왕실과 포르투갈 왕실이 동군연합을 이루었을 때였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마카오와 마닐라 사이의 무역을 윤허하였는데, 당시 마닐라는 갈레온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누에바에스파냐의 사카테카스 은광과 페루 부왕령의 포토시 은광에서 생산된 은 상당수가 갈레온을 타고 마닐라로 향했고 다시 중국인 보따리 상인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의 대금으로 지불되었다. 마닐라를 오고가는 중국인 상인들은 천주, 월항(月港)[3] 광저우 이외에도 마카오를 거쳐서 중국과 무역하였다. 하지만 당시 마카오가 중국과 유럽의 무역 중심지였다는 식으로 과대평가는 곤란하다. 마카오에 체류하는 포르투갈 본토인 인구는 1583년에는 900명, 1640년에는 마카오 전체 인구 26,000명 중 12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 입장에서는 마카오보다는 인도의 고아(인도)가 훨씬 더 중요한 식민 기지이기도 했다.[4] 그리고 어차피 마카오가 없어도 필리핀 도독령의 마닐라는 중국인 보따리 상인들을 통해서 중국과 무역이 충분히 가능했을 뿐더러, 포르투갈 본국은 대항해시대 중국과 유럽의 무역을 전담하기에는 자본력이 매우 부족하였다.

    물론 당시 마카오는 포르투갈과 일본 사이의 무역 중계기지로서 포르투갈과 일본 양국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22년 마카오 점령을 시도했다. 전투가 벌어지던 당시 포르투갈 상인 상당수가 광저우로 무역하러 나가있던 상황이라 전투 당시 마카오에 체류하던 포르투갈인 성인 남성은 150명 정도였고, 네덜란드 공격군의 숫자는 일본인 용병 및 자바인 보조부대 등을 포함하여 800여 명에 달했다. 수학에 능통했던 예수회 수도자들이 계산하고 지휘한 포격이 네덜란드인들을 강타하면서 적의 수가 예상보다 많다고 착각한 네덜란드인들은 도망간다.[7] 중국 영토에서 벌어진 유럽 열강 사이의 전투는 포르투갈의 승리로 끝났으며 지금도 이 전쟁 당시 포격했던 몬테 요새(Fortaleza de Monte)가 마카오의 관광지로 남아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1637년부로 일본에서 포르투갈의 노예무역 및 가톨릭 선교를 문제삼아 교류를 제한하고 그동안 무역해오던 포르투갈 대신 네덜란드와 무역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포르투갈의 주요 식민 기지 중 하나였던 믈라카가 1641년부로 네덜란드인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과거 유럽과 일본을 잇는 핵심 거점이던 마카오의 위상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뒤이어 중원의 패자가 된 청나라가 1685년부로 광저우를 개항하였고, 그 결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미국 등이 광저우 시에 대사관을 지으면서 그동안 마카오가 누려왔던 특권이 유명무실화되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1974년에 앙골라, 모잠비크 등에서 벌어지던 끝이 없는 식민지 독립전쟁에 염증을 느낀 군부 소장파 장교들이 일으킨 카네이션 혁명 이후 모든 원거리 식민지를 자진해서 포기하기로 했고 당시 포르투갈령 마카오도 같이 중국에 반환하기로 했는데, 오히려 중국이 돌려받는 것을 거부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옛 식민지에 이미 합법적으로 거주하던 주민 및 그 후손 전원에게 포르투갈 국적을 부여하였다. 특히 포르투갈 국적법이 개정된 1981년 11월 19일 이전에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태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혈통과 상관없이 포르투갈 국적을 인정하고 있다. 유럽연합 소속국인 포르투갈 국적이 있으면 사실상 유럽 어디서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만큼 이는 상당한 특혜를 부여한 것이다. 포르투갈이 마카오인 모두에게 국적을 부여한 이유에 관한 설 중 하나는 마카오보다 앞서 1970년대 카네이션 혁명 이후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할 당시, 3대 이내 포르투갈 본토 태생의 선조가 있는 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프리카인들에게는 포르투갈 국적을 부여하지 않았는데, 문제는 식민지 전쟁 당시 포르투갈군의 과반 이상을 차지했던 식민지 태생 주민들이 독립 후 내전이 발발하면서 반역자로 몰려 대거 숙청당하는 학살극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포르투갈 정부는 마카오 주민들에게 국적을 주는 방향으로 선회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이후 오랜 세월동안 역사적으로 심각한 인구 부족에 시달렸는데[17] 경제력이나 시민의식이 매우 낙후된 아프리카 식민지들과 달리 본국 못지않게 시민 의식이 높고 경제력이 있는데다 포르투갈 본국과 문화적 연대가 있는 마카오인들은 잠재적으로 상당히 매력적인 이민자가 될 수 있었던 측면이 있다. 지금도 유럽 연합 역내에서 부유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투자이민을 가장 많이 받아주는 나라가 포르투갈이다. 어쨌든 이에 따라 반환 이전 마카오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던 43만 명[18]은 반환 이후에도 포르투갈 국적을 유지할 수 있게 했는데 이는 영국이 홍콩 주민들에게 BNO라는 제한적 국적만을 부여한 것과 비교되는 처사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나무위키 마카오/역사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중국 식민지였던 포르투갈령 마카오였습니다.

    1557년부터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 왕국이 이 지방에 진출해 영유권을 행사합니다.

    포르투갈 왕국이 이 지역을 무력으로 식민지를 삼은 것이 아니고 포르투갈 왕국이 명나라의 환심을 사서 영유권을 얻은 것입니다.

    그 뒤를 이은 청나라도 수십년이나 있던 영유지를 없애기도 그렇고 서양과의 교섭 창구, 무역거래, 무기 수입 등 필요해 마카오는 내버려두고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홍콩을 뜯어내는 것을 보고 자극 받은 포르투갈 왕국이 이 지역에 대한 식민지배의 권한을 요구하고 영국에 패한 청나라가 별다른 분쟁없이 이 땅을 포기합니다.

    1849~1999년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에 맞습니다. 지금은 중국에 반환 되었지만 1999년 까지 포르투칼 영토 였습니다. 포르투갈인 들의 도래 이전과, 1557년 시작된 공식적인 포르투갈인의 거주 그리고 1999년 12월 20일 중국에 행정권이 반환될 때까지,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의 특별 행정구로 승인을 받은 지금까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