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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파병은 어떻게 보면 박정희와 케네디의 외교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국군이 처음으로 베트남전에 투입된 것은 63년 9월 11일, 남부 베트남정부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이때는 불과 130명 규모의 의무부대와 10명의 태권도 교관이 전부였다. 그후 다시 지원요청을 받아 64년 2월 14일 2천명 규모의 비전투부대인 공병대 중심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이때만 해도 국내외적으로 크게 말썽이 없었다.
2천명 규모의 국군병력을 파병하기 위해 정부에서 제출한 동의안은 국회에서 무난히 통과되었다. 그러나 65년 6월 26일 베트남과 미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전투부대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일반국민과 학생들 사이에도 반대의견이 적지 않았고, 국회 내에서는 여야의 입장을 초월해 반대의견이 쏟아졌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는 곡절이 있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미국정부로부터 승인을 받고자 1966년 11월 13일부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 형식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11월 14일 오후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때 박정희는 자진해서 한국군의 파병을 제안했다. 케네디의 환심을 사고 쿠데타의 승인을 받고자 해서였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곤욕을 겪고 있었다. 최고 우방이라는 영국도 파병을 거부할 만큼 외로운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많은 미군이 희생되고 엄청난 전비의 지출로 미국 경제에 주름살이 잡혀갔다.
이런 때에 박정희가 자발적으로 정규군의 파병을 제안함으로써 케네디는 큰 외교적 성과를 얻었고 박정희는 쿠데타의 공식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일종의 야합이었다.
출처: 엑스칼리버 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