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신하들은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이 큰 이방원을 원했지만 태조의 왕비였던 강씨가 간곡히 부탁하였고 정도전 또한 이방원이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이방석을 세자자리에 앉히려했었습니다. 어린 왕을 세우면 신권이 강하기 때문에 재상 중심 정치를 할 수 있었기에 따라서 정치적요인이었던 것이라 볼 수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장남 방우와는 위회도 회군으로 부자의 연을 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적장자를 세자로 내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장남 방우는 위화도 회군을 반역이라고 여겨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철원의 보개산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게됩니다. 누가봐도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방원을 세자책봉해야 했지만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신덕왕후 강씨였습니다. 이성계가 개성에서 궁지에 몰렸을 때 당대 최고 권신인 이인임의 종손자 이제와 자신의 딸을 혼인시켜 이성계의 입지를 다졌고 이성계가 낙마하여 위기에 빠졌을 때 이방원을 보내 개성으로 데려온 것도 그녀였으며 정몽주를 격살하라고 이방원에게 시킨 것도 그녀였고 무엇보다도 이성계는 공처가였다는 것입니다. 신덕왕후 강씨 말이라면 반대를 못하고 무조건 따랐기 때문에 강씨 소생의 방석을 세자로 삼아 분란을 만든 것입니다. 이방원도 그녀 앞에서는 대들지 못했으니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이방원이 과연 왕자의 난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