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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4.01.09

서희의 외교담판의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거란의 요나라가 고려를 1차 침입했을 때 서희가 소손녕과의 외교담판으로 침입을 막아내잖아요.

근데 어떤 내용을 합의했길래 거란이 순순히 고려에서 물러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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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4.01.0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희 담판은 거란의 제1차 침입 때 고려의 장수 서희가 거란장수 소손녕과 벌인 담판을 말합니다.

    소손녕은 침입의 이유로 「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자기 나라와 땅을 연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는 점을 들고, 따라서 「만약 땅을 베어 바치고 조빙을 닦으면 무사할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대해 서희는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옛 터전으로 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한 것입니다. 만일 지계로 논한다면 상국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역 안에 있는 셈인데 어찌 침식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였는데 여진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어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아 성보를 쌓고 길이 통하게 된다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서희의 당당하고 조리있는 변론을 들은 소손녕은 군사를 돌리고, 약속대로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개척하는 데도 동의해 강동6주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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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93년 거란의 1차 침입시 조정에서서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고 강화를 맺자고 주장했지만 서희는 거란의 침략 목적을 파악하고 스스로 강화에 나섭니다.

    서희는 거란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주장과 고려가 송(宋)과 교류하고 있음을 문제 삼아, 고려가 차지한 옛 고구려 땅을 거란에게 바치고 거란과 국교를 맺으라고 강요하였지만 서희는 고려야말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며, 거란과 교류하려 하여도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 때문에 길이 막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의 국왕이 직접 조회하고 거란의 연호 사용에 합의하자, 거란은 압록강 하류 여진족 거주지 280리에 대한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회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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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희와 같은 경우에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반드시 말하고 더불어서

    여진으로 인하여 거란과 교류가 어렵다고 하는 등 하여 논리적으로 대처하였고

    이에 소손녕이 요의 왕에게 보고 후, 강동 6주 등을 돌려준다고 약조를 하고

    물러났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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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란은 5세기에 발원하여 10세기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와 만주를 아우르는 동아시아의 강국이 되었습니다. 송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송나라와 친교를 맺고 있는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993년(성종 12년)소손녕의 80만 대군이 침입해왔습니다. 거침없이 쳐들어오는 거란에게 항복하자는 조정 대신들이 많았지만 고려의 성종은 서희를 보내 담판을 짓게 하였습니다. 소손녕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서희에게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추라고 하였으나 서희는 기죽지 않고 사신으로 왔으니 서로 예를 갖추자고 도리어 소손녕을 압도했습니다. 그러자 소손녕은 너희 신라의 후손이니 철령 이북 땅을 거란에 바치라고 요구하였지만 서희는 고구려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거란과 통상을 하고 싶어도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어서 무역거래가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소손녕은 송과의 친교단절 요구를 받아들이면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고려에 할양해주겠다고 약속하고 물러갔습니다. 결국 서희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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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염민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93년 거란이 소손녕을 장수로 삼아 고려에 침입해 왔을 때, 고려조정에서는 중신(重臣)을 시켜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 이북의 땅을 베어주고 절령(岊嶺, 자비령)을 경계로 삼자는 견해(할지론(割地論)) 등이 나왔다. 이에 성종도 할지론을 따르려 했으나 적장의 석연치 않은 행동을 간파한 서희는 저들의 출병이 영토의 확장에 있지 않음을 아뢰고 왕의 동의를 받아 직접 적진에 나아가 소손녕과 담판하게 되었다. 이 담판에서 소손녕은 침입의 이유로 「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자기 나라와 땅을 연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는 점을 들고, 따라서 「만약 땅을 베어 바치고 조빙을 닦으면 무사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서희는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옛 터전으로 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한 것이다. 만일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 경역 안에 있는 셈인데 어찌 침식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였는데 여진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어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아 성보(城堡)를 쌓고 길이 통하게 된다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고 답변했다. 서희의 당당하고 조리있는 변론을 들은 소손녕은 군사를 돌리고, 약속대로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개척하는 데도 동의해 강동6주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희의 외교담판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3. 30., 한국사사전편찬회)

    위의 내용참조하시면 됩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이었음을 강조하며 상대방의 침략 명분을 정면으로 돌파하였습니다.

    따라서 명분이 사라진 거란은 1차에서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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