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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아웃낫아웃
스트라이크아웃낫아웃23.03.18

조선 후기에 왜 양반계급 비율이 증가했을까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막바지로 갈수록 양반계급이 증가하여 철종대에는 70%까지에 이르렀고 그만큼 생산인구인 상민 천민의 비율은 줄어들었을 텐데 이런 현상이 나타난 배경과 이유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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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 질서가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중인, 상민, 노비가 양반이 될 수 있게 되기도 하였고, 나라의 살림을 위해 노비에게 세금을 내게 하기 위해 상민으로 올려 주기도 했었지요.

    조선 후기에 양반 수가 늘어난 이유는 공명첩 때문입니다. 공명첩은 나라에 곡식이나 돈을 바치면 얻을 수 있는 문서로 '이름이 비어 있는 문서'라는 뜻이죠.

    말 그대로 이름을 적는 곳이 비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명첩입니다. 여기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면 임시 벼슬이 내려지고 양반이 될 수 있다고 하네요. 이 문서는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만들어졌으며 이 문서가 많이 팔림에 따라 양반의 수도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고합니다.

    이로 인해 조선 사회의 신분 질서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문서가 너무 흔해지면서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을 하는 가난한 양반이 나타나는 까닭은 양반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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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신분질서는 크게 변화합니다. 영, 정조대 서얼 허통이 있었는가 하면, 순조대에는 공노비의 해방이 있었고, 향촌에서는(이것이 양반 증가률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향리계층, 서얼계층도 여러 대가 지나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도록 제도 자체가 느슨해져 갔습니다. 즉, 향리도 유학생(유생, 공부하는 사람) 신분이 되면 몇대 후에는 양반이 될 수 있었고, 서얼 역시 서얼 본인은(양반 + 첩의 자식) 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 자식 대나 손자대에 가서 향청에 유학생으로 등록만 한다면 , 어느덧 양반이 되어 양반 행세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영조 대부터 시행되었습니다. 이렇게 법제 자체가 완화되어가니 그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양반이 되는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것이 조선후기 양반 계층의 대량 증가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른바 근대사회로의 발전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회의 질서가 신분질서를 해체하려는 근대화의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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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홍휴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후기에는 상민들이 돈을 많이벌어 그돈으로 족보를사거나 가짜족보를만드는등으로 양반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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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학의 증가로 인해 양반의 수가 증가합니다.

    유학은 벼슬을 하지 아니한 유생으로 양반사족 집안에서 유학을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서얼자들을 포함한 일부 중인층이 스스로 유학이라 칭했고 군대의 일종인 중의위가 유학으로 직역 이동했으며 신분 질거사 느슨태진 틈을 타 양인이나 노비들 중 스스로를 유학이라 꾸며 거짓 호칭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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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반이란 원래 문·무관을 지칭하는 말이어서, 사회신분으로도 당초에는 문·무관으로 복무하거나 복무했던 사람과 그 가족들, 그리고 예비관인인 과거합격자와 같은 소수의 사람들로 형성된 계층이었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가족의 수대에 걸치는 후손들로까지 점차 확대되었고, 또 16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관직이나 과거를 불문하고 독서하는 모든 사람을 포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양반 범주의 확대는 양반 인구를 크게 증가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반은 조선 사회에서 경제적으로도 가장 유족한 계층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여타 하위 신분에서보다는 인구의 자연 증가율에 있어서 우세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특히 빈번하게 닥쳤던 기근과 전염병을 극복하는데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우세하였고, 이러한 우세는 조선 초기 이래로 진전된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의약의 발달로 더욱 신장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세한 경제력으로 인하여 양반 인구는 또한 증가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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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분제의 해이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으로 납속책이나 공명첩이 발행 혹은 시행되었는데, 납속이란 일정 곡식을 납부하면 천민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는 임란 때 재정난으로 재정확보의 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또 군공을 세우거나 일정 곡식을 납부하면 공명첩을 내주기도 하였습니다. 공명첩은 이름을 비어둔 관직임명장입니다. 이런 양난으로 많은 수가 발행되어 신분상승을 이룬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로인해 천민은 줄어들고 양반수는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이앙법이나 광작, 상품작물의 재배 등으로 부농층이 성장하는 때입니다. 이런 부농들은 족보를 사들이거나 위조하는 등의 방법으로 양반이 되었습니다. 반면 일부 양반들은 무늬만 양반이지 과거에 몇대째 들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몰락양반도 나타났습니다.

    조선 말이되면 양반수는 그리하여 대다수가 되고 세와 역을 부담하는 상민층은 줄어들고 천민수도 급감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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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에 양방 계급 비율이 증가한 이유는

    먼저, 조선 후기에는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농업 생산성의 향상과 함께 도시화의 진행으로 인해 수공업과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일어났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양방 계급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계층이 생겨나면서, 전통적인 계급 구조가 유동적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부자층이 발생하면서 양방 계급 비율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는 농업 생산성의 향상과 함께 수출산업과 상업이 발전함에 따라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 사상이 강조되면서, 일반 백성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양방 계급 비율이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양방 계급 비율이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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