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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슴새216
우람한슴새21623.05.20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요?

고려시대까지 불교는 번성하였는데 조선이 건국되면서 불교를 억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왜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이라는 즉 불교를 억압하고 천대한건지 그 근본적인 원인과 배경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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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초기 태조는 개인적으로는 불교에 매우 호의적인 사람이었지만 건국 과정에서 급진적 개혁을 위해 기존 세력인 불교의 억불을 주장하는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았기에 조선 건국과 거의 동시에 하나하나 시행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억불정책은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의 신진사대부는 불교의 세력을 억제하여 불교가 가진 토지 등을 개혁하였습니다. 불교세력을 청산하는 것이 필수적 절차인 것이었죠. 무신정권의 최후의 승리자로 인정받는 최충헌이 왕이 아닌 권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기존의 '고려'라는 틀을 깰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왕조 변경은 분열된 나라들의 통합을 이룬 것이었다면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역성혁명은 특별한 명분이 없이는 그저 지배계층 내의 쿠데타일 뿐인지라 기존의 틀인 고려와는 확실히 달라야 함을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구 왕조와 결별할 목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강하게 펼치게 된 것입니다.

    출처 - 더 위키 숭유억불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시대 때 불교가 들어온 이후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불교는 약 1천 년간 국교의 위치에 서서 정교유착 관계가 깊었다. 지배계층이 불교의 교리에 자신을 끼워 맞추어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호국불교의 예시로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개의 절을 만들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석굴암, 불국사 건립, 법흥왕에서 진덕여왕, 발해 문왕과 백제 성왕이 전륜성왕을 표방한 것이 그 예이다.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북위 때 만들어서 수·당 때 완공된 윈강석굴, 룽먼석굴, 그리고 남조의 양나라 무제의 전륜성왕 표방, 일본 야마토 정권 때 쇼토쿠 태자가 만든 시텐노지, 호류지, 나라 시대 쇼무 천황이 만든 도다이지가 그 예다. 후삼국의 궁예나 견훤은 본인을 미륵과 동일시했고, 고려의 태조 왕건은 훈요 10조에서 불교의 입지를 공고히 하도록 적어 놓았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불교행사를 국가적으로 치렀고, 수도에 궁궐보다 더 크고 높은 황룡사, 흥왕사 같은 거찰을 지었다. 신라 진흥왕 시절이랑 비슷하다.

    일반인의 생활에도 불교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영향력이 강했다. 예를 들어 조선 이전 장례에서는 화장(火葬)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2] 제사 음식도 절에서 차렸다.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茶禮)라고도 말하는 것도 제사상에 차를 올리던 불교문화의 흔적이다. 조선시대부터 불교색을 빼기 위해 술을 대신 올렸지만 옛 이름은 남은 것이다.

    조선 이전에도 태종 무열왕[3]나 고려의 성종처럼 불교세를 누르고 유교적 정치를 추구한 군주들도 있었지만, 이들의 '억불'은 조선의 억불과 비교하면 강도나 목적이 완전히 달랐다.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삼국~고려시대까지는 유불도 삼교가 융합된 유ㆍ불ㆍ선 삼교 합일 사상이 주류였지, 이 중 어떤 것을 강압적으로 배제하려는 태도는 시대별로 강경한 일부 외에는 대세가 아니었다.

    고려 때는 국가 종교가 불교라고 할 만큼 불교가 성행하고 불교의 권력도 강했는데, 이를 숭불호법(崇佛護法)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려 때는 초기부터 지눌 스님 등 많은 승려가 불교의 너무 큰 권력과 폐단을 막는 개혁을 계속 일으켰다. 고려 말기(원 간섭기) 불교는 원나라의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원나라 공주가 시집와서 건축한 석탑 등, 소수의 불교 석탑에 티베트 불교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수선사 천태종 등 토착 불교의 세력이 강해서 티베트 불교가 전파되지 않았다.

    고려 초기부터 불교는 귀족이나 지배층과 연계되어 막강한 교세를 누렸다. 고려 말기에는 "사찰이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소작민들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고[4] 승려들이 권력을 부리거나 재산을 축적하여 고리대금업을 일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고려 초기 때부터 불교의 폐단을 막으려던 지눌, 의천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세력이 강해졌다. 그래서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주장하고 불교를 억제하며, 불교계가 소유한 재산을 축소하려고 했다. 정도전이 '청렴해야 할 승려가 재산을 축내는 일이 많아졌다.'고 비판한 기록이 있다.

    실제로 고려 말에는 절 전국에 약 1만 3천 곳 남짓 있었고, 그 사찰에 토지 20만여 결(結)과 노비 10만여 명, 승려 15만여 명이 속했다고 추산한다. 고려 말 인구를 총 400만 정도, 경작토지 면적을 총 60만 결 정도로 추산하므로 당시 불교계의 재산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

    이 때문에 조선의 신진사대부는 불교의 세력을 억제하여 불교가 가진 토지 등을 개혁하였다. 불교세력을 청산하는 것이 필수적 절차인 것이었다. 무신정권의 최후의 승리자로 인정받는 최충헌이 왕이 아닌 권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기존의 '고려'라는 틀을 깰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왕조 변경은 분열된 나라들의 통합을 이룬 것이었다면, 여말선초의 역성혁명은 영토ㆍ인구ㆍ관제 등의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된 채 그저 지배계층 내의 쿠데타로 국가승계가 된 것뿐인지라 기존의 틀인 고려와는 확실히 달라야 함을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구 왕조와 결별할 목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강하게 펼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후 조선 후기 유림세력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서원이 자기들이 그토록 비판한 고려 말 불교의 모습과 똑같은 형태로 부패했다는 점이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서원 47곳을 제외하고 죄다 쓸어버린 것도, 선조 그리고 같은 유동근이 맡았던 태종이 몇몇 사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찰을 밀어버린 것과 흡사하다.

    출처: 나무위키 숭유억불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귀족 세력을 경계하고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추숭했던 불교를 견제합니다.

    무엇보다 역성혁명으로 세워진 조선으로부터 부패한 불교와 춘추대의의 성리학이라는 기치는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좋은 명분이었습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 교설을 비판하고 오류를 지적하며 불교사상은 인간과 사회, 나아가 국가 전체에 해가 되기때문에 억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숭유억불은 불교 교단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시키고 약하게 유지하기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주요 국가시책 입니다. 불교는 고려 시대의 국가적인 종교였고 조선은 고려시대 당시의 정신적 지주를 없애고 새로운 사상인 유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끌어 가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던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장려 하는 정책을 쓰게 되지만 정작 조선 시대의 양반들과 이성계 마저도 불교를 개인적으로 믿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건국의 핵심은 신진사대부와 신흥무인층의 결합입니다. 신흥무인은 이성계이고 신진사대부는 급진사대부인 역성혁명파인 정도전, 조준이 대표적입니다. 온건사대부는 고려 유지 하 개혁을 주장했는데 정몽주, 길재가 대표적입니다.

    신진사대부는 그 뿌리가 공민왕 대 개혁을 위해 등용된 신흥관리들인데 이들은 안향에 의해 도입된 송대 유학 즉 성리학을 받아들인 이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을 성리학에 의거 운영되는 나라를 구상했지요. 한편 고려가 망하는 근거를 지나친 불교행사 및 지원으로 보아 불교는 탄압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도 불교는 어느 정도 명맥은 유지하는데 왕실에서 후원했던 바 컸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은 불교 교단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시키고 약하게 유지하기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주요 국가시책이다. 숭유(유교를 숭상함)라는 단어가 있지만, 포인트는 억불에 있음에 주의. 억불정책(抑佛政策) 또는 배불정책(排佛政策)이라고도 한다.

    -출처:나무위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의 국시는 불교였습니다.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들이 개혁을 하고


    그 세력이 조선 건국 중심 세력이 되다보니


    고려의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