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는 일제강점기 때 국화가 되었나요?
어느 기사를 봤는데 무궁화는 일제강점기 때 어부지리로 우리나라 국화가 된 것 같더라고요.
진달래가 국화로 의미있다는 말도 있더군요.
무궁화가 국화로 된 배경과 역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법으로 정한 일도 없이, 자연스럽게 무궁화가 국화(國花)로 굳어졌고, 또 국민들은 이 꽃을 사랑해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를 뜰에 심는 것조차 일인(日人) 관리들이 몹시 단속했고, 무궁화로 한반도 지도를 수놓아 벽에 거는 것은 거의 반역죄를 범한 것처럼 다루었다고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가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해 오는 동안에도, 무궁화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이 자랐으며 남궁억 선생은 강원도 홍천 보리울에서 청소년들에게 한국 역사를 가르치기도 하고, 무궁화 묘목을 다량으로 길러 널리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과 용기를 길러 주었다고합니다.
한때, 무궁화가 국화로서 시비(是非)의 대상에 오르내린 일도 있었다고합니다. 무궁화가 북부의 추운 지방에서는 얼어 죽어 한반도 전 지역에서 재배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꽃도 시원스럽지 못하다고 하여, 새로 국화를 제정해 보자고. 또한 무궁화는 나무의 모양이 꾀죄죄하여 때를 벗지 못하였다는 둥, 잎도 보잘것이 없고, 봄철에 싹이 너무 늦게 튼다는 둥, 벌레가 많이 꾄다는 둥, 꽃이 겨우 하루밖에 못 간다는 둥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나라의 상징으로 무궁화를 깊이 사랑해 온 역사적 사실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무궁화는 가꾸어 보면 볼수록 특유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끼게 하는 정원수라고 원예가들은 말한다고합니다.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궁화는 우리나라 어디에나 피는 꽃이랍니다
피고지고 또피는 끈기가 있는 꽃입니다.
무궁화는 자연스럽게 국화가 된것이고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무궁화가 국화로 굳어진 역사적 시점은 개화기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화를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고증은 있을 수 없으나, 대체로 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문호개방 이후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서양 여러나라들이 그들 왕실의 문장, 훈장, 화폐 등에 사용한 국화를 접하게 되자, 어떤 이유로든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 잡고 있던 무궁화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무궁화는 민족의 상징이 되어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여 왔다.
갑오경장 이후 신문화가 이땅에 밀려오면서 선각자들은 민족의 자존을 높이고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를 유지하고자 국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궁억(南宮檍)과 윤치호(尹致昊) 등은 서로 협의하여 무궁화를 국화로 하자고 결의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들 몇 사람만의 독단적인 의견이 아니라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집약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남궁억이 칠곡(漆谷) 부사(府使)로 재임하고 있던 때(1894년?)라고도 하고 1900년대 초라고도 하여 정확한 연도와 날짜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후 곧이어 만들어졌던 애국가의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구절이 들어가게 되고 이 노래가 불려지면서 무궁화는 명실공히 국화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무궁화는 국화 중 하나로, 대한민국의 국화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무궁화는 조선시대부터 국화로 자주 이용되었으며, 국민적인 상징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식민지화 정치에 따라 무궁화는 일본의 국화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무궁화가 일본의 국화로 지정된 것은 국민적인 상징물로서의 무궁화의 의미가 상실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시기에 무궁화를 국화로 지정하였습니다. 무궁화는 일제강점기에도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유지하며, 노래와 시에서도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국기를 제정할 때, 무궁화가 국화로 지정되어 국기에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진달래는 조선시대부터 중요한 꽃으로 여겨지며, 진달래를 국화로 제정하려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궁화가 대한민국 독립운동과 함께한 역사적인 배경과 국민적인 상징성 등의 이유로 국화로 지정되었습니다.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가 된 뚜렷한 법령 규정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무궁화가 한반도에 자라고 있었다는 기록은 기원전 8~3세기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지리서 「산해경」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신라 효공왕이 문장가 최치원에게 작성시켜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도 기록되어있으며,
신라 성덕왕 기사에도 존재하며,
조선 세종 때 강희안이 저술한 「양화소록」에도 기록으로 남겨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민으로부터 사랑받은 대표 꽃이었으나,
조선조에 들어와 왕실화가 이화(배꽃)이 되면서 무궁화는 점차 소원해졌습니다.
20세기의 문명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라는
가사로 애국가에 들어갑니다. 자연스럽게 조선의 국화로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무궁화는 대한민국의 국화로, 그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초 무궁화가 대한민국의 국화로 지정된 것은 1948년 이후입니다. 이전에는 다양한 국화가 대한민국의 국화로 지정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궁화가 국화로 지정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국화를 대한민국의 국화로 지정한 것을 국내에서 수용하며 무궁화가 대한민국의 국화로 자리잡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달래는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꽃 중 하나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국화가 대표하는 대한민국 정신을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궁화에 대한 우리 민족의 한결 같은 사랑은 일제강점기에 시련을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제는 무궁화를 ‘눈에 피꽃’이라 하여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선다거나, ‘부스럼꽃’이라 하여 손에 닿기만 해도 부스럼이 생긴다고 하는 등 무궁화를 탄압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호익(禹浩翊), 남궁억(南宮檍) 등이 무궁화의 가치인식 및 무궁화 보급운동 등에 헌신하였으며, 동아일보에서는 1923년부터 10년 간 매년 무궁화 사진을 게재하는 등 우리 민족은 무궁화 보존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하지요. 오래 전부터 조선 시대 장원급제자 머리에 꽂은 꽃도 무궁화였고, 혼례 때 입는 활옷에 무궁화 수를 놓아 다산과 풍요를 기원했다고 합니다. 1945년 광복 이후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하면서 국기봉을 무궁화로 사용하고, 정부와 국회의 표장도 무궁화 도안을 사용하면서 나라꽃(國花) 무궁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극기와 애국가에 대해서는 제정과 채택, 공포 등에 대한 확실한 규정과 근거가 있으나 국화인 무궁화는 뚜렷한 법령 규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무궁화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자생하고있었으며 우리 겨레의 민족성을 나타내는 꽃으로 인식되면서 나라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홍직의 국어대사전에 '무궁화는 구한국 시대부터 우리나라 국화로 되었는데 국가나 일개인이 정한 것이 아니라 국민 대 다수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니요, 무궁화가 일제강점기 때 국화가 된 것은 아닙니다.실제로, 무궁화는 대한민국의 국화로 1948년 7월 28일 대한민국의 국화로 지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대한민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대한민국 문화를 일본 문화로 대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중 하나로 일본은 대한민국의 국화를 국화에서 동화로 바꾸어 교육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러한 일본의 시도를 거부하고, 무궁화를 대한민국의 국화로 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