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세가 급박해지자 중국이 예상을 뒤엎고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다. 중국은 중일전쟁과 오랜 국공 내전을 수습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지 겨우 1년여가 지난 시점으로 여러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한 상태였다.
티베트 침공과 대만을 장악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고 500만 군대를 유지해야하는 국가 예산의 커다란 부담이 있었기에 전쟁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럼에도 중국은 사회주의권의 최전선인 북한이 패전한다면 이후 전쟁이 중국 본토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우려는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는 중국지도자의 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자 했던 소련이 중국을 떠밀었던 측면도 있었다.
중국은 9월 30일 총리 겸 외교부장 주은래가 "제국주의자의 중국 인근 국가에 대한 침략전쟁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한 이후, 여러 경로로 미군이 38선을 넘어 전쟁을 확대하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10월 초 미군과 UN군은 평양을 수복하고 북상을 지속하였다. 모택동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참전을 통보하고 스탈린이 약속했던 소련군의 공군 엄호 문제가 취소되었음에도 중국 단독으로 참전을 결정했다.
10월 19일 중국 인민지원군은 공군의 엄호 없이 안동(지금의 단동), 집안 등지에서 압록강을 넘어 참전하게 되었다.
중국 홍군의 최고 지도자 중의 하나인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하는 인민지원군 약 70만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북한 쪽에 유리하게 기울어 한때 다시 서울이 함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은 다시 수복되었고 원래의 경계선이었던 북위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출처 :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