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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3.11.30

소록도 한센인 학살 사건은 어떤 사건인가요?

일제는 왜 소록도 한센인을 학살했나요? 소록도 한센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의 배경과 동기에 대해 알려주세요. 해당 사건은 어떻게 밝혀졌나요? 소록도 한센인 학살 사건이 밝혀진 경위와 관련된 사실과 증거들에 대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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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1.3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5년 소록도에서 한센인학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센인들의 고난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해방 직후 병원 운영문제의 주도권을 두고 병원생(=한센인)들과 직원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병원에서는 운영권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고 운영권을 노렸던 의사 "석사학"은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당시 한센인 원생의 대표였던 이종규에게 "운영권을 장악한 자들이 원생들이 먹을 식량과 의약품 등을 반출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주었고 결국 직원들과 원생들은 격렬하게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은 실탄사격을, 병원생들은 직원 몇 명을 폭행치사하는 등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조선인 직원들은 원생들과의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결코 운영권을 한센인들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고흥 치안유지대에 몰래 선을 넣어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8월 21일 아침 원생들은 대표자 90명을 선발하여 협상 장소로 나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죽창과 총이었습니다. 무장한 직원들과 이들이 동원한 치안유지대는 이들 90명을 포박하고 사격하거나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여 버렸습니다. 이들 중에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나 직원들은 구덩이를 파고 이들의 시신과 생존자들을 전부 던져 버리고 기름을 쏟아붓고 불을 질러 이들을 생화장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숨진 한센인들은 84명에 이르고 최근까지도 이 사건의 목격자와 생존자가 소록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소록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도 소록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2002년 8월 22일 11시 30분 사건 현장이던 국립소록도병원 치료본관 앞에 이 사건을 기리는 "애환의 추모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자유로운 사진 촬영이 가능한 장소이며 방문객들이 묵념을 하고 가기도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센인들은 해방 직후 병원 운영 문제의 주도권을 두고 병원생들과 직원 사이에 갈등이 발생, 당시 병원에서는 운영권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고 운영권을 노린 의사 석사학은 주도권을 되찾으려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당시 한센인 원생의 대표였던 이종규에게 운영권을 장악한 자들이 원생들이 먹을 식량과 의약품 등을 반출하려 한다는 거짓정보를 주었고 결국 직원들과 원생들은 충돌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은 실탄을 사격, 병원생들은 직원 몇을 폭행치사, 결국 조선인 직원들은 원생들과의 협상을 제안하게 됩니다.그러나 직원들은 운영권을 한센인들에게 넘겨 줄 생각이 없었고 고흥 치안유지대에 몰래 선을 넣어 지원을 요청합니다.

    8월 21일 아침 원생들은 대표자 90명을 선발해 협상장소에 갔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죽창과 총이었으며, 무장한 직원들과 이들이 동원한 치안유지대는 이들 90명을 포박, 사격하거나 죽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들 중 아직 죽지 않은 이들은 직원들이 구덩이를 파고, 이들의 시신과 생존자들을 던져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게 되며 이렇게 숨진 한센인들은 84명이 됩니다.

    이 사건은 1956년 형식적인 조사만 이루어졌고, 2002년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가 전부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록도 한센인 간부 84명 학살사건’이란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19일에서 22일 사이 벌어진 한센인 학살 사건 입니다. 광복 직후 소록도 한센인들에게 배급될 자재 창고에 보관 중인 의약품을 비롯 식량과 배급품 등을 건강직원들이 섬 밖 육지로 빼돌린다는 정보를 입수한 한센인들이 배급품 확인 과정에서 건강직원들에게 무참하게 학살된 사건 인데 통한의 역사는 거의 가려지다가 1956년 형식적 조사가 이루어졌을 뿐이고 2002년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가 소록도에 건립됐지만 그걸로 끝이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의 조사는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더 진상 규명이 필요한 사건 입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록도 한센인 학살사건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해방 직후 병원 운영문제의 주도권을 두고 병원생(=한센인)들과 직원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다. 당시 병원에서는 운영권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고 운영권을 노렸던 의사 "석사학"은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당시 한센인 원생의 대표였던 이종규에게 "운영권을 장악한 자들이 원생들이 먹을 식량과 의약품 등을 반출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주었고 결국 직원들과 원생들은 격렬하게 충돌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은 실탄사격을, 병원생들은 직원 몇 명을 폭행치사하는 등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조선인 직원들은 원생들과의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결코 운영권을 한센인들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고흥 치안유지대에 몰래 선을 넣어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8월 21일 아침 원생들은 대표자 90명을 선발하여 협상 장소로 나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죽창과 총이었다. 무장한 직원들과 이들이 동원한 치안유지대는 이들 90명을 포박하고 사격하거나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여 버렸다. 이들 중에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나 직원들은 구덩이를 파고 이들의 시신과 생존자들을 전부 던져 버리고 기름을 쏟아붓고 불을 질러 이들을 생화장을 시켜 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숨진 한센인들은 84명에 이르고 최근까지도 이 사건의 목격자와 생존자가 소록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소록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도 소록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