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 했는데요 그 점령 의도와 기간은 얼마나 되었나요
구한말 영국이 조선의 거문도를 불법점거 하였는데요 이렇게 한 이유와 그 기간이 얼마나 갔는지 그리고 조선 정부의 대응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국은 1885년 음력 3월 1일 갑자기 세 척의 동양 함대를 파견하여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습니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의 공식적인 이유를 러시아의 점령에 대한 예방 조처라고 설명하였지만 당시의 러시아 측의 형편을 고려하면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공격적인 대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은 영국기를 게양하고 포대와 병영을 쌓는 등 섬 전체를 요새화하였습니다. 섬 주위에는 수뢰를 부설하고 급수로와 전선을 가설하였습니다. 그 밖에 해문 공사를 벌이고 동도의 남단과 고도를 연결하는 제방 축조 공사도 벌였습니다.
거문도 주둔군은 때에 따라 200∼300명에서 700∼800명으로 증가하였고 정박한 군함도 5∼6척에서 10척까지 증가하였습니다. 영국군과 거문도민과의 관계는 원만하였으며, 도민들은 영국군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보수와 의료 혜택을 받았습니다. 영국 정부는 3월 3일 청나라와 일본에 거문도 점령 사실을 통고하였으나, 조선 정부에는 주청 영국 공사관을 통해 4월 6일에야 통고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3월 중순 무렵에 외신을 통해 점령 사실을 알았으나 영국 측의 공식 통고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정여창 휘하 군함에 엄세영과 묄렌도르프를 승선시켜 거문도에 파견하였습니다. 이들은 거문도에 도착하여 진상을 파악한 뒤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 측과 외교 교섭을 벌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영국 측의 공식 통고를 접수한 뒤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고, 비공식적으로 각국 공사관에 협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사건의 해결 교섭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고 청나라 · 영국 · 러시아 3국의 상호 교섭에 의존할 뿐이었습니다.
점령 초에 청나라는 러시아에 대한 방비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는 계산 아래,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은근히 인정하려는 태도를 취하려 했습니다. 주영청국공사 증기택은 사전에 거문도 점령 계획을 탐지하고, 영국 외무성에 사실 여부를 문의하면서 영국의 계획을 지지하였던 것입니다.
일본도 사전에 영국의 계획을 탐지하여 거문도에 군함을 보내 정찰하였고, 2월 27일 열린 청 · 일 톈진회담(天津會談) 제5차 회의에서 영국의 계획을 폭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문제에 있어서 영국의 위협이 청 · 러의 위협보다 가볍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는 않고 형세만 관망하였습니다. 또한, 미국도 영국의 행위를 동조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영국은 당초 청나라와 교섭하여 거문도를 조차할 계획이었으므로, 3월 14일 증기택에게 거문도 협정 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조선 문제에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이홍장은 거문도사건으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이 제각기 조선 내의 영토 점령을 요구하고 나설 경우에 국제분쟁으로 커질 것을 우려, 영국의 거문도 조차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국제 관계가 어렵게 전개되자 영국은 조선과 직접 교섭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서울의 영국 총영사 애스턴(Aston,W. G.)에게 ‘거문도를 영국의 급탄지로서 임차 교섭을 하되 금액은 1년에 5,000파운드 이내로 할 것’을 훈령하였습니다. 5월 7일 애스턴은 김윤식을 비롯한 통리아문 관원들과 회담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한로밀약이 탄로나 통리아문이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었으므로, 영국과의 협상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애스턴은 임차 교섭 안을 거론도 못하고 포기하였습니다.
러시아 대표 스페이에르(de Speyer, A.)는 한로밀약이 통리아문에 의해 거부당하자,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면서 러시아도 제주도 등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따라서 통리아문으로서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이 불가피했습니다. 이홍장 또한 거문도사건이 국제 문제로 커질 조짐을 보이자 조선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에서 적극적으로 사건의 중재에 나섰습니다.
한편,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던, 4월말부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한 영 · 러의 협상이 개시되어 영 · 러간의 긴장이 크게 완화되었습니다. 더욱이 8월 2일에는 아프가니스탄 협정이 조인되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의 명분이 없어졌습니다. 영국 해군도 거문도에 대한 군사적인 평가를 실시, 거문도가 군항 내지 급탄소로서 적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외무성의 정치적 타결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따라 영국 외상 로즈베리(Rosebery)는 1886년 3월 청나라가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거문도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는 보장만 해주면 거문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여기에 희망을 얻은 이홍장은 같은 해 8월 28일과 9월 2일에 주청러시아공사 라디젠스키(Ladygensky)와 회담을 하였습니다. 회담 결과,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한다면 러시아는 조선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3개조의 약속을 러시아로부터 받아 냈습니다.
청나라는 10월 5일부로 영국 공사관에 러시아 측의 보증을 전달하고 영국의 거문도에서의 철수를 촉구하였습니다. 영국은 청나라를 중재자로 하여 몇 차례 교섭을 벌인 뒤, 10월 29일에 철수 의사를 청나라에 통고하였으나, 조선 정부에는 11월 28일에야 통고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1887년 2월 5일이었으며, 2월 7일에 철수 소식을 접한 조선 정부는 경략사 이원회를 거문도에 파견하여 철수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국이 1885년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위해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 입니다. 조선은 뒤늦게 항의를 했지만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 '거문도'라는 엄연한 명칭을 두고(혹은 의식조차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붙인 해밀턴(Hamilton), 즉 합미돈(哈米𥫱)이라는 명칭을 들이밀었으니 조선으로서는 상황 판단이 더 늦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국이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동북아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서구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거문도로 군함을 파견했는데 이 때문에 거문도는 흡사 세계 각국의 군함 전시장이되었다고 합니다.결국 1886년 12월에야 협상이 이루어졌는데 러시아는 조선을 보호국화하지 않는데 동의했으나, 청과 영국 역시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확인했다고 합니다. 2년의 점령 끝에, 영국은 러시아가 남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어느 정도 얻고, 동시에 거문도가 생각보다 요새화하기 어려워서 이를 시행하려면 꽤나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랬기에 청의 중재를 담보로 합의 3개월, 점령 22개월만인 1887년 2월5일 거문도를 말 그대로 먹다가 소화가 안될 것 같으니 도로 뱉어내고 철수한것 입니다. 또한 점령 시작 때처럼, 조선 정부는 영국 해군의 의 철수 소식을 가장 늦게 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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