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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마더77
망고마더7723.03.16

조선시대에 일반 백성이 왕과 소통하는 방법에는 어떤 방법이 잇었을까요?

조선시대에 서민들이 왕과 소통이 가능했는지요? 가능했다면 방법은 뭐였으며, 소통을 많이 했던 조선에 왕은 어떤 분이 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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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1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국왕이 조정 관리가 아닌 일반 백성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고합니다. 조선 후기에 국왕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백성들과 만났다고합니다.

    백성들은 국왕의 행차가 쉬는 곳에서 기다리다가 상언(국왕에게 올리는 문서)을 올리거나 징·꽹과리를 두드려 호소하는 격쟁으로 의견을 전달했다고합니다. 그러나 궁궐 밖으로 직접 나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백성의 의견을 청취하는 소통 방식은 영조대에 시작됐으며, 실제 영조는 재위 기간 동안 30여 차례 이상 궁궐 밖으로 나왔다고합니다. 흥화문을 비롯해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도 다양한 계층의 백성을 스스럼없이 만났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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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01년(조선 태종 1)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 위에 달았던 북.

    조선 초기에 상소 ·고발하는 제도는 법제화되어 있었으나, 최후의 항고·직접고발 시설의 하나로 신문고를 설치하여, 임금의 직속인 의금부당직청에서 이를 주관, 북이 울리는 소리를 임금이 직접 듣고 북을 친 자의 억울한 사연을 접수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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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왕과 백성이 소통하고 정치를 한 대표적인 곳이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앞이다.

    영조는 26년(1750) 5월 19일 이곳에 백성 50여명을 초대했다.

    한양 오부(五部)를 대표하는 서민과

    하급군인들이었다.

    임금은 “백성을 위한 세금 정책 마련을 위한 모임”이라며 “기탄없이 속에 있는 말을 다하라”고 했다.

    임금은 토의 내용으로 호포(戶布)와

    결포(結布)를 제시했다. 또 세금 폐단을 없앨 수 있는 정책 제안도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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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문소는 조선 시대에 백성을 위해 설치된 고발 기구로 1401년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할 목적으로 대궐 밖에 설치한 북입니다.

    백성들은 억울한 일이 있으면 이 북을 쳐 임금에게 알렸는데, 사건의 종류가 매우 제한되어 있어 실제 크게 이용되지는 않았다고 하며, 영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민심을 얻기 위해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또 당시 왕들은 일반 백성들 처럼 변장하여 궁궐 밖을 시찰하거나, 신하나 암행어사들을 시켜 백성들의 민심을 들어보기도 하는 등 노력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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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는 서민들이 왕과 직접적인 소통을 하는 것은 어렵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서민들도 왕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서민들이 왕과 소통하기 위한 주요 방법은 열흘전과 교서였습니다. 열흘전은 일반적으로 매 월 열흘(음력) 날에 열리는 마을의 시위와 같은 모임으로, 마을 주민들이 열흘전장에서 서로 모여서 현재의 사회적 문제를 논의하고 왕의 명령이나 권고를 요청하거나 불만사항을 제기하는 자리였습니다.

    교서는 서민들이 왕에게 직접적으로 불만사항을 제기하기 위한 방법으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지방 관직을 통해 제출하도록 허용되었습니다. 또한, 왕에게 직접적으로 권고나 건의사항을 제출하기 위한 경국지색 제도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왕 중에서는 정조, 선조, 숙종, 인조 등이 많은 소통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왕은 주로 서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경회루, 의정부, 사당 등에 출입하여 서민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열흘전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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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본적으로 신문고 같은 곳에서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직접적인것은 아니였고

    가끔 민심 행보차 나가서 들었던것으로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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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네, 가능했습니다. 신문고, 상소 등의 방법을 통해 소통이 가능했으며, 왕이 궐 밖으로 행차할 때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할 수도 있었고, 주로 조선 전기에는 세종, 조선 후기에는 정조 등 '어진 임금'으로 칭송 받는 왕들이 소통도 많이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 - -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점은 의견으로 남겨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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