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나라에는 남아선호사상이 생겼나요?
우리민족에 남아선호사상이 어떤 이유로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궁금합니다. 노동력이 여성보다 월등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남자가 사회적 참여에 여성보다 제한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답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남아선호사상은 유교와 관련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유교 전통의 문제라기보다는 중국식의 종법에서 비롯된 문제다. 중국은 3000년 전부터 집안의 상속이나 제사와 같은 중요한 집안일을 모두 아들, 특히 장남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데려와서라도 가계를 이어가게 했는데, 이 중국의 문화가 한국으로 넘어와 남아를 선호하는 사상이 박히게 된 것. 이는 조선 건국자들의 사상 때문인데, 조선의 건국자들은 중국의 문화를 좋다고 여겼고 각종 중국의 문화를 조선에 대입시키면서 중국의 남자에게 돌아가는 종법까지 대입시킨 것입니다.
이는 고위층들 사이에서 교조화가 이루어져 남존여비의 관념으로 굳어져버렸다. 그 결과, 고려까지만 해도 남녀 균분 상속이 존재했고 조선 초까지도 여성의 지위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으나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림 세력이 득세하면서부터는 남아가 없을 경우 양아들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지독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이는 중국의 계승 문화가 그대로 우리나라에 융화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교(특히 성리학)에서 아들이 중요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교에서는 위아래를 구분하는 서열을 중시하며 그 윗 서열에 남성과 어른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 맹자, 주자 등이 제시한 이런 기준은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겨져 이의를 달 수 없었고, 여기에 반박하면 사문난적이라 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했다고 합니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은 3000년 전부터 집안의 상속이나 제사와 같은 중요한 집안일을 모두 아들, 특히 장남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어 집에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데려와서라도 가계를 이어가게 했는데 이 중국의 문화가 한국으로 넘어와 남아를 선호하는 사상이 박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조선 건국자들의 사상 때문으로 조선이 건국자들은 중국의 문화를 좋다고 여겨 각종 중국의 문화를 조선에 대입시키면서 중국의 남자에게 돌아가는 종법까지 대입시킨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서양이 마찬가지 였지만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조선시대때 두드러진 유교의 영향입니다.
남존여비 사상으로 인하여 여자들이 하대를 받았습니다.
가부장적 부계사회 때문 이라 판단 되어 집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남아선호사상은 고려시대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 시대에 이르러 유교의 확산과 함께 강화되었으며, 특히 조선 시대 후기에 와서 직계 가족제도가 강화됨에 따라 더욱 성행하게 됩니다. 더군 다나 조선의 성리학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남자들만이 가능 하게 해서 더욱 더 남아 선호 사상을 부추켰다고 할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아선호사상은 부계제, 부권제 등의 부계혈통의 계승을 강조하는 전통적 가족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따라서 남아선호사상은 유교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물론 힌두교 등의 다른 종교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도 확산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가족제도의 근간은 직계가족제도라고 할 수 있다. 직계가족제도는 장자를 통한 가계 전승을 원칙으로 삼는 부계제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장자는 결혼 후에도 분가하지 않고 부모와 동거하는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또한 장자는 우선적으로 제사(祭祀)를 물려받았으며, 이와 연관되어 재산의 상속에 있어서도 우대를 받았다. 중요한 것은 직계가족제도 역시 부계제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이 제도가 남아선호사상 형성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남아선호사상은 고려시대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의 확산과 함께 강화되었으며,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직계가족제도가 강화됨에 따라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산업화·서구화의 진전으로 전통적으로 중시되어 왔던 가계 전승의 의미가 약화됨에 따라 남아선호사상도 빠른 속도로 약화되고 있다.
남아선호사상은 기본적으로 부계 가족제도 하에서 가계를 전승할 수 있는 아들을 중시하는 생각이다. 따라서 가계 전승을 중시한 전통사회에서는 남아선호사상이 전통사회의 가족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들의 출산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아들의 출산 여부와 아들의 수는 부인의 지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아들을 출산하지 못한 경우, 즉 무자(無子)는 칠거지악(七去之惡)에 속했다. 축첩의 경우에도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한 경우에는 정당화될 수 있었다. 양자제도는 남아를 갖지 못한 사람이 가계를 전승시키는 최종 수단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인구학자들은 남아선호사상이 출산력이나 출생성비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인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아선호사상은 출산력의 고저와는 관련이 적다. 여자 아이를 먼저 가진 경우에는 남자 아이를 갖기 위해 출생아수를 늘이는 경향이 있지만, 거꾸로 남자 아이를 일찍 가진 경우에는 더 이상 출산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남아선호사상이 반드시 다출산(多出産)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아선호사상은 출생성비에는 큰 영향을 미친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남아선호사상이 소자녀관(小子女觀) 및 성감별 등의 의료기술과 결합되면서 출생성비를 상승시켰다. 그 결과 199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의 출생성비가 115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상승하였다. 자연스러운 출생성비가 105 수준임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당시 출생성비는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출생성비의 상승은 전통적인 가족 가치가 강하게 남아 있는 대구를 비롯한 영남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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