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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고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바퀴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000년 경으로서, 탈것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도공(陶工)들이 토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물레에 사용되었다. 바퀴달린 탈것을 사용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였다. 유사한 시기에 인도와 중국에서도 바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황제 헌원씨(黃帝 軒轅氏)가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는 이름인 '軒轅'에 부수로 '수레 거(車)'가 들어간 것이 그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후, 바퀴는 빠른 속도로 북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처음에 바퀴 달린 탈것은 의식(儀式)이나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고, 곧 전쟁에 이용되었다. 바퀴 달린 탈것이 물건을 나르는데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이후부터였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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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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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모헨조다로 문명이 바로 인더스 문명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파키스탄 중남부에 있는, 인더스 문명이 남긴 최대의 도시 유적. 수쿠르에서 서남쪽으로 70 km 거리에, 라르카나에서 서남쪽으로 20km 떨어진 인더스 강 서안의 언덕에 자리한다. '모헨조다로'라는 이름은 '사자(死者)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인더스 문명을 지금의 북부 인도인의 조상인 인도아리아인이 정복했는데, 이때 멸망한 문명의 중심지가 바로 이곳, 모헨조다로였기 때문. 현재는 일부만이 발굴되었는데 현지 주민들은 이곳을 꺼린다고 한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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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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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좌식문화로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7세기, 조선조 최대의 생활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입식에서 좌식문화로의 전환이었다.오늘날 우리들은 일상에서 앉아서 생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좌식 문화). 하지만 그런 생활이보편화 된것은 고작 300여년일 뿐이다. 그전에는 서구나 중국처럼 서서 생활하는 문화였다(입식문화) 17세기에 일어난, 전국적으로 확대보급된 온돌의 대중화가 대격변을 불러일으킨 것이다.-출처:history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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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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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미와 경부는 어떤사람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에 있으면서 조선어가 유창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실제로 조선어장려시험 갑종 1등에 합격하고 경찰관 공로 휘장(警察官功勞徽章) 수상한 경력이 있다.1934년 충청남도 경찰부 고등과장, 1935년 원산경찰서장, 함경북도 경찰국장을 지냈으며 1940년대부터 총독부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마지막 공식자료는 1944년까지 등장하는데, 매일신보 1944년 3월 7일자에 의하면 종로총궐기위원회(鍾路總蹶起委員會) 특별위원으로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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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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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신성로마제국은 실제로 로마제국과 연관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성로마제국은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며 신성하지도 않은 채로 844년이나 존속하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사건을 두고 괴테는 “나의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일보다 더 관심 없는 일이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괴테의 말이 ‘유명무실’한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독일인의 심정을 전적으로 대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독일인의 향수는 종종 발현되었고, 말하자면 아돌프 히틀러에게서 극적으로 또 전형적으로 분출하였다고 볼 수 있다.-출처: 르몽드디플로마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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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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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법전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성문법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르남무의 법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법전을 담은 점토판이며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다. 그것은 기원전 2100년~기원전 2050년 사이에 수메르어로 기록되었다. 비록 서문이 우르 제3 왕조의 우르남무왕을 직접적으로 지목하지만 약간의 학자들은 그의 아들 슐기에 그 공이 있다고 생각한다.-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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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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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 유럽 기사의 사회적 지위는 어느 정도입니까?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사(騎士)는 중세시대 유럽에서 기마로 싸우는 전사 계층이다. 기사는 분류상 귀족이지만 귀족 중에는 최하급 귀족에 속했다. 봉건제는 영주가 가신에게 봉토(封土)를 주고 군사적 충성을 약속받는 형태인데, 국왕→귀족→기사 순으로 봉토와 충성을 주고받는 다층적 관계가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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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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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장미 전쟁을 이렇게 장미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장미 전쟁(영어: Wars of the Roses)은 붉은 장미를 표시로 삼은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를 표시로 삼은 요크 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었다. 1455년부터 1485년까지 벌어졌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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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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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 있는 백제 고분의 수와 분포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비도성 일대 고분군은 도성에서의 거리와 자연지형, 고분군 내 고분 수와 시기 분포, 중요 유물 양상, 유적 내와 인근에 중요 취락 존재 여부 등에 따라 A~D군의 분포정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성 바로 바깥에 위치하며, 큰 봉분도 존재하고, 대부분 잘 치석된 횡혈식석실묘가 축조된 능산리고분군은 A군으로, 이는 동쪽지역에만 있다. B~D군은 동쪽, 서북쪽과 서쪽, 남쪽 지역에서모두 확인된다. 그중 D군은 고분의 수나 내용이 백제 사비기에 집중되기보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로 계기적으로 이어지는 점으로 볼 때 사비도성과 연계되기보다는 다른 중심지가 상정된다.-출처:한국학술지인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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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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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변천 과정 마다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는데, 김홍집의 생애와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개혁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대원군을 불러들여 민중의 불만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총리대신으로 그는 악습을 폐지하고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의 신식화폐제도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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