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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시행했던 사심관 제도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심관은 고려시대 지방에 연고가 있는 고관에게 자기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직이다. 935년(태조 18)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항복해 오자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고, 또 공신들을 각각 출신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해 부호장 이하의 향직을 다스리게 한 데서 비롯하였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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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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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예술을 하는 것의 허용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장성, 일회성, 즉흥성을 특징으로 하는 행위예술은 그 비물질적 특성 때문에 실질적 매매(회화 등의 물질-매매와 소유가 가능)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상품으로서의 예술작품 생산이라는 전통을 거부한다. 또한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오브제들과 항상 연관될 수밖에 없는 행위 그 자체가 실제로 '예술적 의미'를 요구하는 것이며, 이러한 요구를 행위의 모체인 신체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 바로 행위예술인 것이다.-출처:레포트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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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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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의감이라는 곳은 뭐하는 곳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태의감은 고려 시대의 의약과 질병 치료에 관한 일을 맡아 본 관청이다. 고려 목종 때 상약국과 함께 설치되었다. 이 두 기관은 후대 예종 때에 설치되는 혜민국이나 대비원과는 다르게 왕실 전용의 의료기관이었다.-출처: 위키백과
학문 /
역사
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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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공습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진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둘리틀 공습은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 중령이 지휘하는 B-25 미첼의 경폭격기 편대가 항공모함 USS CV-8 호넷을 출발하여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복수로 일본 본토를 폭격한 사건이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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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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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월대 궁궐터는 어떤 곳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만월대(滿月臺)는 고려의 궁궐터를 부르는 명칭이다. 현재는 편의상 그 궁궐을 지칭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태조 대부터 국왕이 공식적으로 머무르는 본궐(本闕)로 사용되었던 이 궁궐은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紅巾賊)이 개경(開京)을 점령했을 때 불타버렸다. 그 뒤로는 복구되지 못하고 터로 남아있으며, 2018년 현재 남북 공동 사업으로 발굴이 추진되고 있다.-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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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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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마다 역법이 달랐을 텐데, "그레고리력"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은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양력(陽曆)으로,,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여 이 역법을 시행했기 때문에 그레고리력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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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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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도 "유구국"이라고 기록된 류큐 왕국의 역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초기 중국·일본·여진 다음으로 많은 교류를 가진 나라가 琉球였다. 유구는 19세기말 일본에게 멸망하여 지금은 없어졌지만 14∼15세기까지는 중국의 책봉체제에 편입하면서 국제무대에 등장하였고, 또 활발한 해외활동으로 남방무역을 주도하였던 나라였다.-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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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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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유럽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해 굉장히 인식이 안좋았다고 하던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럽에서는 유대인 편견이 고대 시대 때부터 기원이 있다. 중세 시대(500~1400)에는 주로 유대인을 예수 죽음의 책임을 묻는 초기 기독교 신앙과 사상을 바탕으로 한 신화에 기초했다. 이러한 종교적 편견에 뿌리를 둔 의심과 차별은 근세 시대(1400~1800)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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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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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에 불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제는 내재화된 불교 사찰과 관련된 기술을 이용해 신라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즉 백제 사찰은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에 많은 영향을 끼치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고대 한반도는 불교를 매개로 점차 문화공동체로서의 모습을 만들어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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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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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역사적 유물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굴된 출토유물과 온돌구조가 전형적인 발해 것임은 물론 고구려의 전통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적갈색의 띠고리 손잡이 달린 호((帶狀把手壺), 내만구연호(內彎口緣壺) 등은 형태뿐 아니라 제작기법에서도 고구려의 전통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또한 ‘ㄱ’자로 꺾어 건물 밖으로 빼는 온돌구조 역시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적인 집안 동대자(東臺子)에서 출토된 온돌구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해무리굽 청자(중국 浙江省 越州窯, 9세기)는 당시의 폭넓은 국제 교류를, 인물문양토기편은 생활문화를, 금 도가니는 수준 높은 생활상을 반영하는 유물들로 평가된다. 특히 토기에 새겨진 인물문양은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모습으로 마치 강강술래를 연상시킨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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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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