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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대의 해상선박 및 항해기술이 뛰어난편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초기에는 육지 연안을 따라 내왕하는 연안 해로였기 때문에 주로 노를 젓는 배를 썼지만 다양한 통로로 바다를 건너는 해로교통이 발달하던 4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의 배 만드는 기술도 점차 발달했다. 그래서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 당나라의 조선기술보다 크게 앞섰다. 또한 신라는 개국 초기부터 일본의 침략을 자주 받아 이를 막느라 수군(水軍)과 배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특히 군선, 즉 바다에서 싸울 수 있는 전투용 배를 만드는 기술도 함께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대 유례왕 6년(289)과 22대 자비왕 10년에 군선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에 배 만드는 기술자를 파견한 기록도 있다.-출처:아틀라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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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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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골품제는 어떻게 이루진 체계였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는 연맹왕국(聯盟王國)에서 귀족국가로 바뀌어가고 있던 시기에 정복, 병합된 각지의 크고 작은 성읍국가(城邑國家) 또는 연맹왕국의 지배층을 왕경(王京)인 경주(慶州)에 이주시키고 이들을 중앙의 지배체제 속에 편입시켰다. 이때 이들 세력의 등급·서열을 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골품제도가 제정되었다.다시 말하면, 신라국가가 다양한 귀족세력을 재편성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었다. 신라는 이렇게 함으로써 지배체제를 구성하는 한편, 지방세력도 통제할 수 있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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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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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당파싸움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500년의 조선시대 흑백논리 정치역사, 당파간의 싸움이 매우 잦은 시대였다. 당쟁의 시작은 보통 임진왜란 직전 선조가 통치하던 때로 잡고 있는데, 이조전랑 자리에 누구를 뽑을 것인가를 두고 서로 대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이조전랑의 후보에는 김효원과 심충겸 두 사람이 올랐다.출처:종합시사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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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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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굴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위대한 3인의 왕-1위 세종대왕 (재위기간 : 1418년~ 1450년)조선의 4대임금 세종은 유교학자이자 언어학자이며 오늘날의 한글을 창제한 인물이기도 하다. 훈민정음 창제당시 성균관의 언어학자들과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며 세종의 아버지 이자 선대임금인 태종 이방원의 국방정책의 영향에 따라 조선의 국방력 또한 어느정도 안정을 시킨 임금이라고 하며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계최고로 끌어올린 임금이며 조선 역사상 위대한 성군이라 일컫는다.2위 영조대왕 (재위 : 1724년 ~ 1776년)조선의 21대 국왕인 영조대왕은 신문고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고자 하였으며 당시 농업국가였던 조선 백성들의 농업장려를 하여 상업 및 농업 발달을 활발하게 한 조선의 임금이다.3위 정조대왕 (재위 : 1776년 ~ 1800년)정조대왕은 백성들과 어울리기를 정말 좋아했던 왕이라고 하며 왕릉 참배를 100회이상 하여 백성들과 직접만나 즐겼다고 한다. 또한 인재를 중시하여 정약용을 등용하였으며 백성 중 누구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왕의 시찰도중 언제든 간하도록 하였다.-출처: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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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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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께서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꾼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한제국 선포는 중국 중심의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 질서 관념으로 보면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원래 제국(帝國)의 군주를 의미하는 황제라는 칭호는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군주가 되고 나서야 사용할 수 있는 칭호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주1 이후 일본이 이미 ‘제국’을 칭하였듯이, 대한제국도 근대 국제사회에서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활동하려는 의지를 황제국 선포로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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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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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제도와 반상제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양천 제도와 반상 제도조선은 사회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법제화하였다. 양인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유민으로, 조세, 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다. 천민은 비자유민으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천제의 원칙에만 입각하여 운영되지는 않았다.관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던 양반은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의 신분으로 굳어져 갔고, 양반 관료를 보좌하던 중인도 신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간의 차별을 두는 반상 제도가 일반화되고,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정착되었다.-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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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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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은 뒤, 인간 개선을 목적으로 우량종 육성이란 용어를 사용했던 골턴은, 1883년 선택적인 출산을 의미하는 우생학이라는 용어를 창안해냈고, 이를 "인종을 개선하는 과학"이라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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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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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차례상은 원래 음식이 작게 올라 갔다고 하던데..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분제 철폐 후 오히려 제사상이 화려해졌는데 상당히 관련이 많다. 과거엔 서민과 양반이 지내는 제사 횟수부터가 달랐다. 3품관 이상은 고조부까지 4대 봉사를 지내고, 6품관 이상은 증조부까지 3대 봉사, 7품관 이하 선비들은 조부모까지 2대 봉사를 하고, 서민들은 부모만 제사를 지냈다(조선조 경국대전).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고 반상이 무너지면서, 모두가 너도나도 높은 양반처럼 4대 봉사를 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무리해서라도 일반 서민들이 양반식 차례 음식을 준비하다 보니 부담이 컸는데도 그랬다. 그런 정서가 이제까지 계속 내려오다 보니까 문제가 많이 됐지 않았나합니다.-출처: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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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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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적으로 쌀이 주식이 된 것은 언제부터 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가 쌀을 주식으로 본격적으로 이용한 것은 통일신라 시대부터로 알려진다. 우리나라의 재래벼는 쓰러짐에 약하고 도열병에 약하지만, 우리 풍토에 맞게 추위에 강하고 물이 부족해도 잘 자라는 특징을 가졌다.재래벼는 지금과 같이 수확량이 많은 형태가 아니라 천수답, 추운 날씨에서도 잘 자라는 벼로 점차 진화됐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농민 스스로 우량 품종을 개발했고 일부 품종은 지식인들에 의해 장려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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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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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 시행했던 진대법의 진정한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시대의 빈민구호제도. 봄부터 가을까지 곡식을 대여하였다가 수확을 한 겨울에 갚게 하는 제도이다. 진은 흉년에 기아민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대는 봄에 미곡을 대여하였다가 가을에 추수 뒤 회수한다는 뜻이므로, 진대는 흉년이나 춘궁기에 농민에게 양곡을 대여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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