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걸작인 최후의 만찬은 누가 그렸나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95년 부터 1498년 까지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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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싱 경기에서 양선수 뒤에 줄을 묶어서 경기하는데 그 이유와 역할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스풀이나 리얼이라고 하는데, 선수의 검 끝에 센서와 점수판을 연결하는 역할을합니다. 이걸 통해서 판정을 합니다. 감사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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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트 경기는 왜 안전장구를 착용하지 않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단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상당히 숙련된 프로들입니다. 그래서 넘어지는게 다반사인 스케이트보드는 이미 잘 넘어지는 법을 체득했기 때문에, 표현에 방해되는 보호구들은 착용하지 않고 출전합니다. 보호구로 무릎이나 헬멧을 쓸 수도 있지만, 보호되는 범위보다 경기에 방해되는 수준이 더 크고 행여나 넘어지더라도 충격을 최소화할 자신이있기 때문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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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맥과 건강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수맥이 건강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 없습니다. 풍수지리는 고대 중국에서 시작된 학문인데 자연환경의 배치와 조화가 인간의 운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 중 하나가 수맥인데 현대의학이나 과학에서 입증된 바는 없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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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왕의 식사 시간은 언제 였나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왕조실록에도 식사 시간은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식사시간이 딱 어느때다 이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지 않을까 추측됩니다.일반적으로 조선사람의 생활패턴 자체가 해와 함께 하기 때문에 일출 후 아침, 정오에 점심, 해질 무렵에 저녁일 것입니다만, 다양한 행사로 인해 그때마다 바뀌었을것으로 추측됩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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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어린이는 몇살부터 학교애 갔나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세 정도가되면 서당에 가서 기본적인 한자, 역사 등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서당을 졸업하면 좀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위해 사립학교인 서원이나 정부가 설치한 국자감에서 추가로 공부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전 문학이나 시험을 준비했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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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하나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국이 당시에 식민지가 많아서, 어느 시간대에도 영국의 영토는 해가 뜨고 있다는 것에서 나온 말입니다.당시 식민지를 포함한 영국의 영토는 전세계의 25%정도 엿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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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는 몇 촌까지 결혼이 가능했나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말씀하신 대로 왕족이나 귀족사이에서는 친족 간의 결혼이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일반 시민들도 하는 사회전체적인 현상이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고 남매간 결혼도 가능했다고 주장도 있는데, 이것도 명확한 기록은 없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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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초에 특허등록된 상표 및 상품등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최초의 특허는 1449년 영국입니다. 존 웃핍턴이 "A Method for Making Stained Glass"라는 발명에 대해 특허를 받았습니다.그리고 상표도 영국입니다. 1876년 베이스 브루어리의 맥주 삼각형 로고가 첫 상표 등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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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어떤 이유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시행했나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흥선대원군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팽창과 영향력 확대, 서구 열강의 지역 확장 시도에 맞서 조선의 독립과 안정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수교 거부 정책은 기본적으로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에도 외세와의 교역 및 외교 관계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강화도조약은 1876년 일본과 체결한 불균형 조약으로, 공격적인 개항 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에 의해 강요된 조약입니다. 그래서 대원군은 일본과 서구 열강으로부터 자주권을 지키고자 했고, 이를 위해 외부 세력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이려 했다.실제로 대원군의 외교 관계 수립 거부 정책은 "물금사신주의", 즉 "왜구(왜인)와 양반(서양인)에게는 사신을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이 원칙은 전통적인 쇄국주의 정치 철학인 '관동삼불가(중요한 문서를 주지 않는다)'에 따른 것으로, 대원군은 왜구와 양반을 모두 조선의 왕인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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