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우리나라 연은 언제부터 날리기 시작했나?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은 아시아에서 발명되었으나 정확한 기원은 추정만 되고 있는데, 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술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남동부에 위치한 무나섬 중석기 시대 동굴 그림으로, 기원전 9500~9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자료에 따르면 우리 민족이 연을 언제 처음 만들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라시대에 최초의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http://kite.rweb.co.kr/kite/kite_history.html?gnb_no=2&snb_no=1
학문 /
역사
23.01.31
0
0
톱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 문명 혹은 나라는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류 역사에 있어 최초의 톱은 톱니 모양으로 깎인 돌이나 조개껍질 상어 이빨 등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처럼 하나의 공구라고 하기에는 아직 아쉬웠던 톱이 그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한 것은 고대 이집트시대부터인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다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28735858&memberNo=44928417
학문 /
역사
23.01.31
0
0
양반의 기준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관제상의 문·무반을 뜻하는 본래의 양반 개념은 고려·조선시대의 지배 신분층을 뜻하는 양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양반 관료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그 가족,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다음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25_0020_0030_0010
학문 /
역사
23.01.31
0
0
조선시대에 불교는 왜 탄압을 받았나요?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조선시대 자체가 숭유억불의 시대였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조선시대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교 사회였고 불교는 양반 사대부층의 주류 사회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불교의 종교적 역할은 사라지지 않았고 왕실이나 민간에서 유지되었다. 윤회나 인과응보 등 불교의 사유 세계는 전통적 심성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내세의 명복을 빌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관념과 현실의 재액을 피하고 복을 추구하며 후세의 번성을 바라는 신앙 형태가 관습화되었다. 조선 전기에 억불(抑佛) 정책이 시행되어 공식적인 폐불(廢佛)의 단계에 이르렀고 그와 함께 유교적 제의(祭儀)와 사후 관념이 불교를 대체하였지만, 조선 말까지 불교의 종교성과 내세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이는 불교의 생명력이 이어져 고려 이래의 전통을 계승하여 토착화의 길을 밟아 왔음을 의미한다.조선시대 불교 정책은 억불로 요약된다. 성리학을 기치에 내건 조선 정부와 유학자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취급하였고 그 억제만이 정도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믿었다. 국가 정책상으로도 연산군, 중종에 이르러 공식적 폐불이 단행되었다. 이는 불교의 존재를 부정하고 승려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었고, 공인되지 못한 불교는 법제의 밖에서 스스로를 보전하여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외부적 강제에 의해 쇠퇴 일로를 치달은 끝에 결국 파국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명종대에 일시적으로 양종(兩宗)과 승과(僧科)가 재개되었고, 이를 계기로 내실을 다진 불교계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군(義僧軍)을 일으켜 국가의 위기 극복에 큰 공적을 쌓았다. 이후 불교는 사회적 효용성을 인정받으면서 사찰을 중건하고 교학과 수행에 힘썼으며 민간 신앙을 포섭하여 폭넓은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11_0060_0010_0010
학문 /
역사
23.01.31
0
0
결혼반지는 언제부터 주고받았을까요?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사에 따르면 다음의 내용이 존재합니다.결혼반지를 처음 이용하기 시작한 로마 시대에는 남성이 결혼할 여성을 돈으로 사는 매매혼의 증거로 결혼반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결혼반지는 아내가 남편에게 귀속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시로 사랑보다는 구속의 의미가 컸다. 결혼반지는 그리스도교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https://digitalchosun.dizzo.com/site/data/html_dir/2016/02/24/2016022413317.html
학문 /
역사
23.01.31
0
0
거문고와 가야금의 차이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문고는 줄이 6개며, '술대'라는 대나무로 만든 막대기로 줄을 치면서 연주를 합니다. 반면 가야금은 줄이 12개로, 손가락으로 직접 줄을 튕겨 소리를 냅니다.다음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https://news.koreadaily.com/2003/05/28/society/opinion/227293.html
학문 /
음악
23.01.31
0
0
관우가 중국에서 신격화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관우는 삼국지의 촉나라의 장수로서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은 것으로 유명합니다.자료에 따르면 다음의 내용이 존재합니다.참고하시기 바랍니다.관우의 신격화촉한의 무장이었던 관우가 전쟁의 신, 재물의 신, 무(武)의 신으로 추앙받은 것은 명청대에 소설화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유행하면서부터이다.무장인 그가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장군이 되고, 수·당대에는 무성왕묘(武成王廟) 종사를 통해 국가의 사전(祀典)에 편입되었으며, 송·원대에는 후(侯)에서 공(公)으로 그리고 왕(王)으로 추존되고 명·청대에는 관우 신격화가 절정에 달해 황제(皇帝)에 등 극하고 신령(神靈)으로 숭배된다. 특히 종교적으로도 불교에서는 사찰의 수호신, 도교에서는 만능수호신, 유교는 충의(忠義)의 무신으로, 국가통치질서 확립 수단으로 이용되었다.조선에서 관우를 섬기며 제사를 지내는 관왕묘의 건립은 정유재란 때 이루어졌다. 1598년 당시 명군(明軍)이 남묘를 지었고, 이듬해 동묘가 세워졌다. 그리고 고종대에 이르러서는 북묘와 서묘가 건립되는 등 한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생겼다. 이때 관우신앙의 정치적 활용도 주목할 만하다. 선조, 숙종, 영조, 정조, 고종 등은 관우의 ‘충의용절신(忠義勇節信)’을 퍼뜨려 자연스럽게 왕에 대한 충성을 중요한 미덕으로 내세울 수 있었고, 이를 통한 권력 강화를 기대했다.
학문 /
역사
23.01.31
0
0
주사위는 어디서 유래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주사위의 역사 인류 역사에 언제 주사위가 처음 등장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집트에서는 이미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상아나 동물의 뼈로 된 주사위가 있었다. 주사위는 발굽이 있는 동물의 관절 뼈(거의 정사면체 모양이다)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역사시대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학문 /
역사
23.01.31
0
0
북한도 세계 문화 유산이 있을까요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문화재청의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의 세계유산 (총 2건)1. 고구려고분군 (2004, 문화) - 위치 : 평양, 평안남도, 남포, 황해남도 - 구성 : 약 30여기 고분 1) 평양 : 동명왕묘 주변 고분군(진파리 고분 1~15호 포함), 호남리 사신묘 주변 고분 2) 평안남도 : 덕화리 1,2,3호분 3) 남포 : 강서삼묘, 덕흥리 고분, 약수리 고분, 수산리 고분, 용강대총, 쌍영총, 4) 황해남도 : 안악 1,2,3호분 - 개요 : BC 3세기부터 AD 7세기까지의 고분군은 강성했던 고구려 문화를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유산임. 고구려 고분은 뛰어난 건축기법을 보여주며, 인근 다른 지역의 고대 매장풍습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유산. ※ 중국 “고구려의 수도와 고분군” (2004, 문화) - 구성 : 3개 수도, 40기 고분(왕릉 13기, 귀족묘 26기) 1) 요녕성 환인현 : 오녀산성 2) 길림성 집안현 : 국내성․환도성(환도산성 등), 왕릉 14기(광개토대왕릉과 비 포함), 귀족묘 26기(무용총, 각저총, 장천고분 등)2. 개성 역사유적지구 (2013, 문화) ㅇ 위치 : 개성시 장풍군, 개풍군 ㅇ 구성 : 12개 유적 1~5) 개성 성곽 (5개 구역), 6) 만월대와 개성 첨성대, 7) 개성 남대문, 8) 고려 성균관, 9) 숭양서원, 10) 송죽교와 표충사, 11) 왕건릉, 7개 릉, 명릉 일대, 12) 공민왕릉 ㅇ 개요 : 개성은 10~14세기 동안 지속된 고려의 역사와 문화를 증명하는 유산. 한반도를 통일한 고려왕조 이전 여러 국가들의 가치관이 융합된 모습을 보여주며, 주변 국가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보여줌. 동아시아에서 불교사상이 유교사상으로 전환되던 시기를 잘 보여주는 특출한 유산
학문 /
역사
23.01.31
0
0
에도에서 도쿄로 바뀐게 맞나요??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료에 따르면 다음의 내용이 존재합니다.'에도'로 불린 도쿄는 일본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18세기 중반에는 인구 100만 명 이상의 대도시로 변모했다. 1868년 에도 막부가 무너진 뒤 에도는 도쿄로 개칭되었다. 이로 인해 천황이 교토에서 도쿄로 이동하면서 도쿄는 명실상부한 일본의 수도가 되었다https://www.metro.tokyo.lg.jp/KOREAN/ABOUT/HISTORY/history01.htm
학문 /
역사
23.01.31
0
0
163
164
165
166
167
168
169
170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