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일본은 왜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에다가 참배를 하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였고, 전범국가가 되었지만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군국주의가 되었더라도 일본 자신들만의 입장으로는 일본을 위해 싸운 위인들이 안장되어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피해를 겪었던 우리나라와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국가들, 그리고 국제적, 도덕적으로 본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단순히 야스쿠니 신사에 한 개인 가문의 조상이 안장되어있다면 그가 전범이든 아니든 큰 반대는 없으나 일본의 총리나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참배한다는 것은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던 우리나라로서는 분노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일본 사람들은 우리가 절에 가서 기도하듯 신사에 가서 공물을 바치고, 향을 피웁니다. 한 개인들이 그러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외교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 있는 국가지도자가 그러는 것은 일본이 삼가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미래의 파트너로 생각한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학문 /
역사
23.08.16
0
0
역사의식을 함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잘 정리되어있는 서적을 중심으로 먼저 공부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환단고기부터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근현대사 서적들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환단고기의 경우 꽤나 잘 정돈되어있고, 중국의 사료 등과 비교해보았을 때 진서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최근에 대두되고 있으나, 실물이 없고 전해내려온 필사본을 근거로 한 사료가 있고, 해당 사료에 고대에 쓰지 않는 표현이 있다는 논쟁으로 현재 강단사학계에서는 위서 논쟁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배달환국 시대부터 고조선, 부여 등의 역사를 언급한 내용이 있으니 참고만으로라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술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거쳐, 고려사, 고려사절요,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순으로 고대사를 정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조선말기부터 근현대사는 정확한 자료들이 많으니 서점에서 마음에 드시는 역사학자의 저서로 골라 보시면 됩니다.
학문 /
역사
23.08.11
0
0
왕이 다음 사람에게 왕위를 넘기면 그 왕은 상왕이 되는데요 그렇다면 세자의 경우에는 뭐라고 부르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맞습니다. 형식상으로는 세자의 자격이 폐하였으니 폐세자라고 하지만, 공식적인 명칭으로는 세자가 되기 전 위치인 대군 또는 군으로 불리게 됩니다. 왕은 최상위 결과이니 왕이었다가 선위를 하게 되면, 자신은 이전 왕이니 상왕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왕이었다가 왕의 자격이 폐해진 경우도 마찬가지로 대군이나 군으로 명명합니다. 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종 이방원의 정실부인 세 아들 중 첫째인 양녕대군이 원래 왕세자였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왕세자의 자격을 폐하게 되었고, 이후 셋째 아들인 축령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어 향후 세종대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첫째는 다시금 양녕대군의 지위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학문 /
역사
23.08.09
0
0
징기스칸은 몽골내 납치혼을 금지시켜놓고 왜 전쟁때 유부녀겁간은 전쟁의 낙이라고 부추겼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족 내 납치 혼을 금지한 것입니다. 전쟁 중 적국 점령지에 대한 것은 전사들에게 주는 포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포상안으로 둔 것입니다.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윤리의식이 있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현재의 생각으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중국이나 한민족 고대국가들에서도 전쟁 후 점령하게 되면 포로를 본토로 데리고 와서 노비 등으로 쓰기도 하고 노략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진 왕 같은 경우 점령지에 그러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당시 몽골의 경우에는 전쟁에 승리하게 되면 그러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포상을 두어 더 큰 전투력을 고취시키는 방법으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학문 /
역사
23.08.09
0
0
남산은 옮길수 있을지언정 이미 내린 결정은 고칠수없다는 말로서 한번 결심한 일은 절대로 굽히지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사자성어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南山可移(남산가이)입니다. 南: 남녘 남 山: 매 산 可: 옳을 가/들을 가/가히 가/쯤 가(정도)의 뜻으로 '呵(가)' '訶(가)의 원자에서 파생하여, 좋다, 가능(可能)의 뜻임移: 옮길 이 당나라(唐)의 정사(正史)로 이십사사(二十四史) 가운데 하나인 구당서(舊唐書)의 이원굉전(李元紘傳)에 민사소송을 담당하는 벼슬아치인 이원굉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안건 처리에 대단히 공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승려가 어떤 사람이 절간의 석마(石馬)를 빼앗아 갔다고 하면서 탄원하였는데 그 범인은 태평공주라는 조정의 권세를 등에 업은 세력가였습니다. 하지만 이원굉은 조공정하게 판결하여 석마를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이에 이원굉의 상관인 두회정이 태평공주가 두려우니 원래 판결을 고치라고 권고하였는데 이에 그는 판결문에 '남산은 옮길 수 있어도 판결은 흔들릴 수 없다.'라는 뜻의 南山可移 判不可搖(남산가이 판불가요)라는 여덟 자만을 썼다고 합니다. 이후로 남산은 장안성 남쪽의 큰 산인데 이원굉의 뜻은 원래 판결을 움직인다는 것은 남산을 움직이기보다 어렵다는 의미로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결정에 대해 비유해서 표현할 때 남산가이(南山可移)라고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3.08.08
0
0
왜 합스부르크왕가는 근친결혼을 고집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합스부르크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가 되기 위해 문서까지 위조해서 귀족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문의 위대함을 증명하고자 오스트리아 지역의 빈을 문화의 도시로 육성시켰고, 슈테판대성당과 빈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많은 음악가들의 활동무대가 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가문들과 결혼정책을 펼쳤고, 심지어는 황제의 외동딸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130년만에 황제가문으로 상승했고, 영토도 가지게 됩니다.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1세는 부르타뉴 가문의 안과 결혼했고,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자신의 딸 마르게리따를 결혼시킵니다. 그러나 부르타뉴 영토를 차지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불만을 가진 샤를 8세가 자신의 결혼을 무효화 시키고 무력으로 부르타뉴를 다시 차지하고 자신의 장모 겪이었던 안과 결혼하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은 숙적이 됩니다.이에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 왕가와 사돈을 맺었으나 스페인의 상속자들이 모두 사망하고 결국 합스부르크가의 수장인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국왕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헝가리 왕가와도 사돈을 맺었는데 헝가리 왕이 전쟁에서 전사하자 헝가리 지역도 차지하게 됩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반합스부르크의 성향이 강했기에 합스부르크가에서 차지하고 있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그 사이는 프랑스임)를 다스리기에 어려움을 느꼈고, 카톨릭인 스페인은 이교도와 개신교와의 결혼은 금지하고 있었기에 영토를 지키기 위해 혈통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박히면서 궁극적으로 근친혼을 선택하게 됩니다. 근친혼에 의해 태어난 자식 중 돈카를로스는 지금에 와서 말하는 취약X증후군이라는 유전적 질환을 가졌는데 주걱턱, 짝다리, 정신질환을 자겼었고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필리페 4세 국왕은 여동생의 딸과 결혼하는 등 근친혼을 이어갔고, 그의 딸 마르가리따는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와 정혼합니다. 그녀도 자랄수록 주걱턱이 심해지고 21세에 사망하게 되었고, 그의 남동생 카를로스 2세도 38세에 사망하였습니다. 후대에 조사해보니 근친혼일 시 나타나는 유전병에 의해서 스페인 왕실의 자녀 34명 중 50%가 10살 이전에 사망하였으며, 근친혼에 의해 유전병으로 주걱턱 등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10여년간 이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끝에 결국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합스부르크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인 로드링겐 가문의 공작 프란츠 1세와 결혼하면서 근친혼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슬라브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이유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당하게 되면서 전쟁에서 패한 합스부르크 제국은 마침내 종지부를 찢게 됩니다.
학문 /
역사
23.08.08
0
0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가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종교적 이유와 경제적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이베리아 반도는 오랜 기간 가톨릭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대립해왔는데, 이베리아 가톨릭 세력의 이슬람 축출 이후 이베리아는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해졌지만 이베리아의 왕조들은 이슬람 세력을 경계했고, 동방에 있다는 전설 속의 가톨릭 왕 프레스터 존을 찾아 동맹이 되는 것을 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중해를 통해 동쪽으로 가는 것은 오스만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기에 대서양을 통해 반대편으로 간다면 프레스터 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경제적으로는 페스트로 인한 인구 급감하였고 봉건제를 빠르게 붕괴시켰습니다. 노동력 감소로 소작농의 임금이 치솟았고 소작농을 못구한 영세 영주들이 파산하였습니다. 이에 시장과 화폐 경제, 교역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전체적인 국가 경제 팽창이 필요하게 되어 대항해 시대의 실마리가 되었다 볼 수 있습니다. 교역에서의 향신료의 확보 문제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이슬람과의 교류를 통해서 나침반, 아스트롤라베, 사분 같은 측정기술로 원양항해술이 발달하게 되었고, 해도제작능력이 발달하였습니다. 이러한 항해술을 기반으로 운영될 선박들의 건조기술 등이 발달하여 안정적으로 원양 항해를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학문 /
역사
23.08.07
0
0
나폴레옹은 어떤 이유로 몰락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이 무리하게 러시아 정복 원정을 나갔다가 실패하여 군대를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도 없이 새로이 급조된 미숙한 군대를 이끌고 나폴레옹은 연합군과 라이프치히에서 사활을 건 최후의 일전을 벌였습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20만명이 넘는 러시아 · 프로이센 · 스웨덴의 연합군이 나폴레옹이 이끄는 라인 동맹과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프랑스로 진격하였으나 승리를 눈앞에 두자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1814년 3월 9일에 러시아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영국 4개국이 쇼몽 조약을 체결하여 4국 동맹 체제가 형성되게 됩니다.4국 동맹군은 곧 파리에 입성하고, 나폴레옹은 퇴위하고 부르봉 왕가의 정부가 복귀하여 4국 동맹과 파리 강화 조약을 맺습니다. 프랑스가 점령하였던 모든 외국의 영토가 반환되었고, 프랑스의 국경선은 1792년의 상태로 되돌려졌으며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내세워 유럽을 정복하고 황제가 되었던 나폴레옹은 자신이 이용한 혁명의 정신을 깨달은 유럽의 민족주의에 의해 몰락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08.04
0
0
이성계는 고려 시절 수많은 가병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건국 당시 지방 호족 세력들의 힘을 빌어 활용키 위해 태조의 정비(正妃) 6명과 기타 부인 23명 등 29명은 모두 태조가 지방의 호족, 공신·귀화 귀족 등과 유대를 맺기 위한 혼인 정책에 따라 취한 그들의 딸들로 이 가운데 경주의 평준, 합주의 이원, 춘주의 왕유, 서경의 김행파, 신주의 강기주 등 유력한 호족들이 그들의 딸을 태조에게 바쳐 세력보전을 꾀하였습니다. 태조는 또한 지방 호족을 회유하여 그들에게 중앙관직의 위계와 똑같은 명칭의 향직위를 주고, 중앙 정부를 축소한 듯한 조직을 갖게 하여 지방 자치를 맡게 하는 한편, 기인이라 하여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삼아 그 세력을 견제하였습니다. 여기서 지역 호족 세력에 지방자치를 맡겼으니 공권력 수행 및 치안, 경호를 위해 사노, 사병 등이 발달되었고, 무신정권 시대에 들어 시작되어 고려말기까지 경대승, 최충헌의 도방, 최우의 서방, 최씨가문의 마별초, 이성계의 가별초 등 이름있는 가문들은 가병들을 공식적으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중앙집권 성향이 적었고, 지방분권 성향이 컸던 탓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국경의 여진 등의 공격을 방어하며 관리해야 했기에 더 강하고 많은 가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08.02
0
0
과거 고려시대에 정말 요동성을 점령한 적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 요동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다가 연나라의 공격으로 잃게 되었다가 한나라 때 고구려 미천왕이 그 지역 한사군을 몰아내고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점령하고 고구려 영토로 수복된 후 요양 지역에 요동성을 쌓았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이 지배하다가 대진국 발해가 건국되며 다시 찾아와 200년간 영토였다가 발해가 멸망하며 요, 금, 원나라에 속했었습니다.그러다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는 요동도지휘사사를 두어 요동을 포함한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가지 트러블이 생겼고 고려는 공민왕 5년에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이후 관서 지방과 관북 지방 북쪽으로 영토를 넓혔습니다.공민왕 18년 고려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는데 동북면 원수 이성계는 1370년 음력 1월 압록강과 파저강을 건너 이오로티무르가 지키는 우라산성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서북면 원수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을 공격하여 요동성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합니다.
학문 /
역사
23.08.02
0
0
127
128
129
130
131
132
133
134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