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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와 소설은 어떻게 다른건지 궁금해지는군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자와 동화는 "어린이에게 말하다"는 의미가 있죠.그래서 대부분 어린이의 감성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동화라고 생각하는데,또 한 분야는 판타지일 수 있습니다.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는 동화에 속했죠.그러나 현대사회의 기술발전은 상상 속에서 가능한 일을 현실화시키기 시작했고,판타지나 SF(Science Fiction)은 동화가 아니라, 소설로 분류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동화가 만약 어린아이에게 교훈하기 위해 쓰여졌다면, 독자가 정해져 있는 거죠.그러나 소설은 특정 독자를 규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쓸 수도 있을 테니, 독자가 다르기 때문에 인칭이나 문체가 다를 수 있겠죠.
학문 /
문학
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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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에 부처님이 두분 이상 모시는 이유?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웅은 법화경에 석가모니를 큰 영웅으로 지칭하여 사용하는 말이니, 당연히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이 중앙에 모시겠지요.그리고 양 옆에는 아미타불과 약사 여래불을 모시는데,일반적으로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에 등장하시는 두 분이시죠.나무는 귀의한단 의미이고, 아미타불은 극락왕생을 주관하시고,관세음보살은 이 땅의 희노애락을 주관하시니,이 두 분에게 다 맡기는 것이 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에,보통 대웅전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 양 옆에는 아미타불과 약사 여래불을 모실 것입니다.
학문 /
미술
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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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동화를 보면 공주들이 키스를 받고 살아나는 장면은 다시 어떤걸 묘사한걸까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개적으로 키스를 하는 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증명이고결혼이라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친 후 키스하기도 하죠.동화에서 키스라는 상황을 설정하는 것은 사랑의 힘을 강조하기 위해서겠죠.사랑은 마력이나 저주를 끊고, 죽음도 극복할 수 있다는 표현이 아닐까요?
학문 /
역사
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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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최초에 콘서트는어떤분이 했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하에 동일한 질문이 있네요.그 답변에 보면, 콘서트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1978년, 산울림이 문화체육관 공연하면서 처음 사용했고,콘서트처럼 공연을 한 최초의 가수는 이자영이며,1957년 12월 15일에 공연했다고 하네요.https://www.a-ha.io/questions/4e7e93cd2f60f993bf95314cd751053b
학문 /
음악
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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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초재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야율초재는 금나라의 관원으로 있다 몽골에 멸망 당한 후 칭기즈칸에게 선택된 인물이니,몽골인이 아니라 중국인이죠.그래서 그는 한자로 책을 남겼고, 중국의 원서에서만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죠.역사를 기록하는 입장에서는,중국 본토를 초토화시켜 유목을 위한 목초지 땅으로 만들고, 중국인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했다는 기록을 들이대면,야율초재는 중국인의 생명의 은인이고, 현재 한족이 다스리는 중국이 유지되게 한 영웅이겠죠.그러나 야율초재 때문에 몽골이 인재 등용과 문화수용, 그리고 조세제도를 수립했다고 할 수는 없겠죠.몽골인들이 지금도 중국 대륙을 다스리고 있다면, 야율초재는 존재도 알기 어려웠을 수 있지만,중국 대륙을 한족이 다스리고 있으니, 그나마 몽골제국의 통치 아래, 찾아내고 찾아낸 한족으로 봐 줄 인물이 야율초재 아닐까요?
학문 /
역사
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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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에서 종교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죠.1077년에 일어난 사건인데요.독일 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4세가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빌었던 사건입니다.사건의 원인은 주교임명권이었는데요.황제는 영주의 권력을 가진 주교들을 임면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고,교황은 주교임면권이 교황에게 있다고 한 것입니다.1073년 그레고리오7세는 교황이 되면서 성직자 임명권은 교황과 교황청에만 있다고 선언했습니다.이 시기에 작센에서 반란을 진압하던 하인리히4세는 1075년 반란을 진압하고, 밀라노의 주교 선출 권리를 행사했고,원칙주의로 개혁을 주장하던 그레고리오7세는 하인리히4세를 기독교에서 파문시켜버립니다.황제가 통지권력을 강화하려면 영주들의 충성을 받아내야했기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주교들을 서임권을 행사했죠.그러나 교황은 종교적인 추종세력이 많았기때문에, 오히려 신성로마제국에서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이끌어냅니다.이 배경은 하인리히4세의 강력한 황권에 부담을 느낀 제후들이 있었고, 교황의 파문을 구실로 돌아서버린 것이죠.하인리히4세는 사신을 보내었으나 교황은 두려워 피해버립니다.1077년 1월 말 하인리히4세는 카노사로 피해 버린 교황에게 직접 추운 날씨에 맨발과 누추한 옷을 입고 성문 앞에 무릎을 꿇죠.교황은 주저하다가 3일이 지나 파문을 취소해 줍니다.하인리히4세의 파문이 취소되었으나, 신성로마제국에는 새로운 루돌프를 황제로 등극시키려고 반란이 일어납니다.교황은 루돌프를 지지하며, 하인리히4세를 다시 파면해 버렸으나,교황의 변심때문에 제후들이 하인리히4세를 도와, 1081년 바이스 엘스터 강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황제로 추대된 루돌프가 전사하고 반란세력은 흐지부지되어 버리죠.하인리히4세는 내란을 진압하고 황권을 강화하며 그레고리오 7세와 손 잡았던 제후들을 제거합니다.그리고 그 해에, 동로마제국황제였던 알렉시우스1세가 이탈리아 노르만족의 침입하자, 하인리히4세에게 동맹을 요청합니다.하인리히4세는 동로마제국과 동맹을 맺은 후에, 그레고리오7세를 폐위시키고 클레멘스3세를 교황으로 선포하고 이탈리아로 진격합니다.복수를 한 셈이죠. 교황이 제후들과 제국의 틈에서 줄타기를 잘 하면 황제의 힘을 제어할 수 있었던 시기도 있었고,오히려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기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학문 /
역사
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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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 궁전은 남아 있지 않은걸까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원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존속했던 백제의 유적이 충남 공주시에 있는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등 2곳이 있고, 충남 부여군은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등 4곳, 그리고 전북 익산시에 있는 왕궁리유적, 미륵사지 등 2곳이 있습니다.궁전 건물이 남아있지는 않죠.질문자님이 다녀오신 백제 문화단지에 복원을 해 2천년 전의 기록을 재현한 것이죠.신라와 고구려의 왕궁도 남아있는 것은 없죠.신라의 왕궁 역시 월성의 초기 왕궁이 있었다는 기록을 재현해 놓았죠.고려의 왕궁도 흔적만 남아있을 뿐 건물이 남아있지 않습니다.한반도가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는 전쟁터였기때문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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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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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스킨라빈스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베스킨라빈스는 1945년에 캐나다계 미국인 어바인 라빈스와 처남이었던 버턴 베스킨이 설립했는데요.31은 매일 다른 아이스크림을 한가지씩 먹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아이스크림을 갖추었다는 뜻이죠.1945년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서 어바인 라인스가 Snowbird Ice Cream 가게를 열었고,1946년 버턴 베스킨은 '버턴의 아이스크림 가게(Burt's Ice Cream)' 를 열었습니다. 두 사람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만났으며, 베스킨은 라빈스의 여동생 셜리 라빈스와 결혼합니다. 두 사람 다 전쟁 중에 해군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미 해군의 아이스크림 보급함인 쿼츠에서 군복무를 했죠.두 가게가 합쳐질 때 누구의 이름을 앞에 넣을 지 결정하기 위해 동전던지기를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네요.2006년에는 로고를 개편해, 1년 12달과 31일을 포함하는 로고를 사용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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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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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가 왜 청백리인것 처럼 포장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황희 신화1380년 명나라 홍무제는 명나라 건국공신이었던 당시 재상, 홍유용을 역모죄로 처형하고,1382년 재상을 중심으로 있던 중서성을 대폭 축소, 폐지하였고, 전각대학사를 설치했죠.6부의 직속 상관을 황제가 차지해 전제군주제를 실시합니다.그 이후 10만명이 황제의 비밀경찰조직인 금의위에 의해 처형됩니다.이 소식이 조선에도 전해졌고, 조선의 관료들은 관료제도와 왕의 권력을 견제하는 시스템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그 결과 황희 신화가 탄생한 것이죠.청렴한 청백리를 관료의 대명사로 홍보한 것입니다.그리고 청렴할 수 밖에 없는 사람, 재산이나 정치적 배경이 부족한 사람을 영의정의 자리에 앉힌 것이고요.그래서 황희는 최장수 영의정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죠.세종대왕은 87세까지 황희를 의지했고, 황희 정승도 세종대왕과 함께 많은 치적을 남긴 것도 사실이죠.황희 신화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활용되었고, 현대사회에서도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잘 활용되었죠.이제는 신화로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SNS가 너무나 발달해 정보를 통제할 수 없기때문에,국무총리나 대통령이나 황희 신화인, 청백리 이미지를 덧씌우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네요.
학문 /
역사
2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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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영부인 애비타의 생애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녀의 풀네임은 María Eva Duarte de Perón(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페론)입니다.애칭으로 Evita(에비타)라 불렸죠.에비타 페론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연기자로 활동하다, 후안 도밍고 페로네스의 아내가 되었죠.남편이 대통령이 되고, 아르헨티나의 정치를 노동자와 여성의 권리를 높이는 쪽으로 '사회적 행복성장'정책을 이끌어낸 사람입니다.여성의 선거권, 연금제도, 무상의료를 시행하는 병원, 보호소, 복지시설, 평생교육을 시작했죠.그녀의 정치적 활동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아르헨티나 시민들은 그녀를 추앙하고, 그녀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런 정치적 활동은 의회주의가 아닌 대통령부부의 결단이었고,결국 군부 구테타의 원인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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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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