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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 정치기구 6조가 뭐에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중앙정치기구 6조는 조선시대 행정을 담당했던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를 총칭하는 것입니다.이조는 관리의 임명과봉급, 관리 등용시험 주관, 근무 성적평가를 하며호조는 인구 및 부역, 조세, 경제 문제 관리예조는 예법과 음악, 국가의 제사, 잔치, 외교, 교육을 담당하고병조는 무관의 임명 및 군사에 관한 일, 우편 등의 업무, 서울의 문과 궁궐 등의 열쇠 관리를 하였고형조는 법률과 형벌 주관, 고공과 노비에 관한 일을 하였으며공조는 산림이나 연못, 기술자 관리, 각종 토목공사와 수벌 업무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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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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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수왕은 왜 이름이 장수왕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전하는 시호는 장수왕이며, '긴 장'(長), '목숨 수'(壽) 로 긴 수명이라는 뜻입니다.오래 살아 장수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것이 많은 호응을 얻고, 불교 용어 장수와 연관짓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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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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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 명절인 설날의 유래가 어떻게 되는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설날의 기원은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다만, 7세기 중국의 사서 수서와 구당서에 신라관련기록으로 매년 정월 원단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날 일월신에게 배례한다 라고 하여 신라 때 설날의 모습을 볼수 있으니, 신라 이전부터 설을 명절로 지내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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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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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합스부르크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합수부르크는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중부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은 가문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면서 근세 유럽의 황제가문으로서의 최고 권위와 영예를 누린 가문입니다.당시 스위스는 독립된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우력가문이 세력권을 다투고있는 상황이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 까지만해도 알프스 산맥 언저리에 웅거하던 시골 귀족가문이었습니다.합스부르크 가문은 7세기경부터 알자스 일대에 터를 잡으며 교황을 배출한 적도있는 대귀족인 애티오넨 가문의 방계가문으로 나름의 명예정도는 있는 가문이었습니다.이 중 브라이스가우 백작 군트람에게 아들 로첼린이 있었고, 1020년경 로첼린의 장남으로 합스부르카가의 시조인 라트보트가 오늘날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 하비히츠부르크에 기반을 잡고 성을 쌓은 후 백작 노릇을 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작되었습니다.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 아르가우 주를 벗어나 유업의 패자로 급부상할 계기는 13세기 신성로마제국의 대공위시대였으며, 강력한 위세를 지닌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잇달아 파문을 하는 상황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후사가 끊어진 후 강력한 교황권 및 제후 간의 권력 다툼으로 약 20년간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며 대공위 시대의 혼란한 상황이 이어집니다.대공위시대가 이어지며 독일의 정세가 혼란해지자 교황이 누구든 황제가 되어달라고 하니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은 내가 황제를 하기는 싫지만 남의 세력이 커지는것도 싫어 타협책으로 한미한 가문의 가주를 황제로 옹립하여했는데 이때 합스부르크 가문이 포착됩니다.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은 루돌프1세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제국내에 세력이 큰 가문이 아니었으니 황제가문으로 고려되지 않았지만 루돌프1세에게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 대자라는 배경이있었습니다.황제 선거가 난할을 겪자 마인츠 대주교와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원하고 황제자리를 생각도 않던 루돌프 4세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기자 독일 주요가문과 혼인동맹을 맺습니다.결과 1237년 루돌프 4세는 독일왕이 되고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뤄 로돌프 1세로 즉위하며 대공위 시대가 종식됩니다.아르가우 주의 백작에서 독일의 왕이 된 루돌프 1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가문의 영지를 적극적으로 확장합니다.협소한 스위스 산골짜기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확장을 모색한 루돌프 1세에게 포착된 것은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독립한 이래 오스트리아를 통치해왔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어 공위시대의 혼란기였습니다.이 상황에서 황제 루돌프 1세는 독일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의 오타카르 2세를 누르고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승리, 1278년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차지하여 장남인 알브레히트에게 주었습니다.루돌프가 이러는 사이, 1291년 스위스 4개 주가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켜 1351년 스위스가 독립에 성공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는 오스트리아가 됩니다. 대공위 시대 직후 루돌프1세와 알브레히트 1세가 왕위를 차지하지만 알브레히트 1세가 조카 요한에게 암살당하고 제위를 룩셈부르크 가문이 차지한 후 14~15세기 동안 신성 로마제국의 제위는 유력가문인 룩셈부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이 양분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위에서 배제되지만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그 인근에서 기반을 다져갑니다.합스부르크 가문은 특이한 전략인 결혼동맹을 통해 세력을 늘렸으며 1335년 케르텐 공국과 크라인 공국이 합스부르크의 직할령으로 반환되며 영토가 확장되었습니다.기존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크라인 공국이 더해지고 1263년 티롤 후백국까지 얻으며 현대 오스트리아 영토의 뿌리가 완성되었습니다.이에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비롯한 독일 남동부 일대가 합스부르크 기반으로 자리잡고, 합스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에서도 막강한 제후 세력으로 도약하며 1335년 이후 막시밀리안1세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 상황을 유지합니다.1437년 신성 로마제국 황제 겸 보헤미아 국왕 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었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대를 잇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황제의 사위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1438년 황제위에 오르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성기가 열렸습니다.16세기 카를 5세 대에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패자로 등극됩니다.그 기반은 선황 막시밀리안1세로 , 스스로 최초의 선출황제임을 선언하며 황제 선출에서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고 안정된 황권을 바탕으로 막시밀리안 1세는 결혼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칩니다.저지대를 보유하게 된 부르고뉴 공국, 레콩키스타를 완수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연합 스페인 왕국, 동유럽에서 헝가리 왕국과 그 동군연합인 크로아티아 왕국, 슐레지엔을 포함하여 보헤미아 왕국 등 막대한 영토를 보유한 야기에우워 왕조와 혼인을 성사시켰습니다.혼인동맹 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들 가문이 모두 대가 끊어지면서 그 가문들의 영토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대로 인수합니다.15세기 중반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다시 차지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쾰른 등의 라인강 유역과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하에 있던 알자스 등지에서 팽창정책을 펼치던 부르고뉴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나 부르고뉴 공작이었단 용담공 샤를이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를 두고 선사하니, 부르고뉴와 같은 발루아 왕조이자 명목상 종구국이었던 프랑스가 유럽내 손꼽히게 부유했던 부르고뉴를 향해 야욕을 드러냅니다.이로 인해 부친의 급사 이후 부르고뉴의 여공작이 된 마리 드 부르고뉴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부르고뉴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혼인하여 프랑스가 노리던 북해 연안 17주, 플랑스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역 아래 놓이게 됩니다.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을 장악하는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명군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가 브르타뉴 공국으로 손을 뻗자 브르타뉴 공녀 안과 정략 결혼을 추진하여 발루아 왕조 프랑스를 멸할 시도를 하는 등 서쪽 국경의 판도를 넓혀갑니다.막시밀리안 1세는 결혼동맹에 관심이 많았는데, 장남 필리프를 스테인 카스티야 왕국의 왕녀 후아나와 혼인, 딸인 사르가레테는 왕세자 후안과 결혼시키면서 스페인과 결혼 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은 필리프와 후아나의 아들 카를 5세가 물려받게됩니다.막시밀리안 1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 크로아티아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야기에우워왕조와 불편한 관계에도 결혼동맹을 성사시키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1438년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절되었을때 신성 로마제국 제위와 함께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위도 일시적으로 차지하나, 두나라의 지방 귀족이 실권을 쥐고 있어 왕권을 행사할수 없었고, 약2년만에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상실합니다.후,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는 야기에우워 왕조가 차지하게 되는데, 결혼동맹의 대가 막시밀리안 1세는 야기에우워 왕조 출신 울라슬로 2세의 딸 안나와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를, 안나의 동생 러요시2세와 손녀딸 마리아를 혼인시킵니다.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의 침공으로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며 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조가 단절되고 두 나라의 왕위는 페르디난트 1세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지위가 되었습니다.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자 스페인 이사벨 1세의 손자인 카를 5세는 부모와 조상의 후광,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막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됩니다.이시대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외형상 최전성기를 맞으며 카를 5세가 통치하게 된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통일을 이루고 대서양 무역을 장악하고 신대륙까지 접수에 들어간 강대국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강대국을 둘이나 가지게 됩니다.카를 5세 치하의 제국은 이를 저지하려던 발루아 왕조의 프랑스어 붙어 승리를 거두며 이탈리아 반도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시킵니다. 오스트리아-스페인에 의해 처참히 무너진 프랑스는 30년 전쟁으로 부활을 선언할때까지 100년동안 유럽 구석에서 버티며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필요에 따라 양측에 적절히 붙고 배신하며 자국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카를 5세는 헨리8세의 이혼과 재혼 허가조차 좌지우지할 만큼 권력이 강했습니다.합스부르크의 패권을 새로 위협하기 시작한 변수는 종교개혁과 오스만제국으로 북독일의 프로테스탄트의 세려글 누르기 위해 스페인군을 독일로 데려온 것이 정치적 패착이 되었습니다.독일인이 주류인 신성 로마제국의 일에, 동군연합이라는 합스부르크의 사적인 혈연으로 연결되었을 지언정 결국 외국 군대인 스페인군을 개입하여 독일어권 세력들 간의 연대의식을 방해했음과 암묵의 룰을 깼기 때문입니다.독일의 제후들은 종교와 별개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짙은 불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가 30년 전쟁, 신성로마제국의 무너지게 됩니다.16세기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의 독일영방을 분열시키며, 최전성기를 맞은 쉴레이만 1세 치하의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왕국을 무너뜨리고 동쪽 국경을 엄습했습니다.내전과 1592년 1차 빈 포위로 합스부르크는 광대한 영토 전면에 걸쳐 전선을 확장시켜야 했습니다.가히 호사다마라 할수 있는 위기였지만 카를 5세는 군제개혁을 통한 전술상의 성공과 신대륙에서 나오는 부, 그간 다져온 많은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가문의 유산을 지켰으나 막시밀리안 1세 이래로 추진되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절대왕정 수립 시도는 무산되고 영방체제가 계속되었습니다.유럽 전역을 석권했던 카를 5세 후 합스부르크가문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계 합스부르크로 분열되었고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 스페인, 네덜란드 저지대, 이탈리아반도 영토, 아메리카 대륙, 필리핀 등 나머지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양위했기 때문입니다.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 2세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시조로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2세에게 부유한 저지대와 식민지를 물려줬지만 형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 제위를 물려받은 페르디난트1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추진한 결혼 덕에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막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어 페르난디트 1세 후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의 최강자가 됩니다.스페인 합스부르크왕조에 귀속되었던 저지대 국가는 펠리페 2세의 폭정으로 북부 7주인 네덜란드가 1648년 독립하였으며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남은 오늘날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로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에 귀속되어 약1세기 동안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남았습니다.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를 지키기 위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기 때문에 종교 문제에는 관대했으나 개인적인 이유로 루터파에 관대했던 막시밀리안 2세 이후 후계자들은 갈수록 종교 문제에 완고하게 대처합니다. 결국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비타협적인 종교관은 30년 전쟁을 부르게 되고 이 결과 독일은 인구가 2/3으로 급감하고 국토가 황폐해지며 종전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합스부르크가문은 북독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지위는 명목상의 작위로 전락합니다.합스부르크 가문의 중흥은 18세기였으니 1638년 오스만 제국이 대규모로 침공해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지나 레오폴트 1세는 독일의 영방 제후들과 폴란드 - 리투아니아를 우군으로 끌어들여 빈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퇴각하는 오스만제국군을 추격하여 대튀르크 전쟁을 일으킵니다.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으로 가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탈환 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동유럽을 잠식합니다.대튀르크 전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후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과 여러 전쟁을 통해 동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2차 빈 공방전에서 도움을 준 폴란드- 리투아니아를 분할하기도 했습니다.스페인 합스부르크가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를 두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이 왕위를 주장하며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하고 13년에 걸친 전쟁에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를 따는것은 성공하나 프랑스와 스페인을 합칠수는 없었습니다.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과거 스페인령이었던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 이탈리아 영토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획득하는 반명,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는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1세기간의 길고 느린 쇠퇴를 하게 됩니다.대 튀르크 전쟁의 후속전으로 치워진 6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에 승리를 거두어 세르비아와 보스이나 북부 등을 획득했습니다.합스부르크 가문은 카를 6세가 아들을 낳지 못해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는데, 카를 6세는 살리카 법에 위배됨에도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문을 물려주기 위해 국사조칙을 공표했습니다. 주변 세력들은 살리카 법을 근거로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에 카를 6세는 주변국에게 많은 이권을 떼주거나 영토를 양보해야 했습니다.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프랑스와 접하고 있던 로트링겐의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반발이 심했고, 카를 6세는 1736년 로트링겐 공국을 신성 로마제국에서 분리시켜 프랑스로 넘겨줍니다.1734년 일어난 폴란드 왕위계승 전쟁의 결과 체결관 빈 조약에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위해 주변국들에게 양보하고 그 결과 토스카나 대공국과 파르마 공국을 획득하는 대신 나폴리 왕국과 시필리아 왕국을 내줍니다.그가 사망하자 프로이센 왕국 등 주변 여러 세력들이 아미라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계승을 반대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고 바이에른 선제후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7세로 선출되나 그는 머지 않아 사망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어질수 있었습니다.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결과 슐레지엔을 신흥세력 프로이센에게 뺏기고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동맹의 역전을 하며 노력하나 7년 전쟁에서 패하고 독일 내에서의 패권을 잃었습니다.마리아 테레지아의 치세동안 보헤미아와 헝가리 등 반항적이었던 영지를 평정하고 북쪽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분할, 획득하게 됩니다.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위기에 직면합니다.합스부르크 가문은 마리앙투아네트를 구실로 혁명 전파를 두려워한 여러 왕정 국가들과 같이 대프랑스 전쟁을 일으키나 혁명 프랑스군의 전투력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당하며 벨기에와 이탈리아를 뺏깁니다.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프란츠2세는 동군연합 상태를 유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오스트리아제국을 세우고,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과 공동전선을 결성하나 치명상을 입고 1806년 신성 로마제국 자체가 와해됩니다.2차 오스트리아 전쟁에서도 패하며 유일한 해안 지역인 달마타이를 뺏기고 프란트 2세 장녀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내는 등의 시기를 거치나,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을 거쳐 목락하면서 재반격에 나서 프랑스를 핀치로 몰아붙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후 처리를 위해 빈 회의세어 잃었던 영토의 상당수를 회복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후계인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자 빈 체제를 주도하였습니다.민족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덮으며 독일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고 그동안 합스부르크제국을 오스만 제국으로 부터의 보호자로 여겼던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이 민족의식에 눈뜨기 시작합니다.민족주의속에 오스트리아 제국은 건재하나 1866년 독일 통일을 두고 벌어진 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하고 통일 독일에서 배제되었습니다.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결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게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지역을 상실하고 분가가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도 멸망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도 상실합니다.패배의여파로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이 동요하고,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국 내에서 독일인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던 헝가리인들과 타협하여 새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합니다.독일 통일에서 배제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수립으로 서쪽으로 진출이 막히자 남쪽 발칸 반도로 진출을 시도했고,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환자로 전락하면서 발칸 반도의 수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외치는데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이를 세력을 확장할 기회로 보았습니다.보오전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독일과 우호관계를 다진 뒤 보스니아를 확보하며 남방 진출을 시도하지만 남쪽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며 발칸반도의 판세는 복잡해집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에게 제위 계승자가 암살당하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1918년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카를 1세가 퇴위하며 합스부르크 시대가 막을 내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도 해체되었습니다.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중장 출신인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헝가리 왕국을 복원하며 헝가리 왕위는 남았지만 명목상의 복원이었을 뿐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입국을 거부하는 등 섭정 지위로 1인 독재체제를 유지, 2차세계대전 후 헝가리에 사회주의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가문이 군림하는 나라는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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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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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가 멸망한 원인이 기황후 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나라 멸망의 원인으로는 황제계승 원칙의 부재로 , 혜종의 즉위년도는 1333년으로 1294년 1대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고 39년동안 8명의 칸이 등장하였으며 평균 5년 미만 재위했습니다. 권력 쟁탈로 인해 복잡해진 계승문제는 황제계승원칙의 부재로 멸망의 길을 걷게됩니다.또, 황태자 양위사건으로 1356년 권신 카마를 앞세워 양위를 청한 기황후는 현 황제 순제를 태상황으로 요청하는데 이때 황태자의 나이 16세, 원 순제의 나이는 36세입니다. 이 사건은 기황후의 첫번째 내선시도였으며, 내선 시도 이후 카마는 처형되나 기황후는 처벌 받은 기록이 없습니다.2년 뒤 기황후는 두번째 내선시도를 하고 이때 순제가 화가 나 기황후를 2달동안 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또, 원나라의 권신의 득세로 대원 순제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권신 바얀은 245자의 직감을 가지고 있을만큼 원나라 권력의 중심이었으며 권력을 독신한 권신에 의해 국운이 쇠한 원나라는 태자 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서로 황제가 되겠다고 싸우며 혼란의 시기를 보냅니다.또, 황화 범람과 전염병이 원인으로 1220~1269년 사이 황화강 중상류에 제방이 7번 붕괴되어 범람하며 주변의 마을이 초토화 되었습니다. 1351년 황하범람은 황하의 물길이 바뀔정도로 큰 범람으로 보수를 위해 백성 15만명 군대 2만명이 동원되었으며, 동원된 인원이 한족 농민들이었습니다.그러다보니 한족 농민들의 반감이 자연 재해속에 증폭외었고, 전염병까지 돌고 이것이 확대되어 몽골 인구의 1/3이 사망합니다.또, 홍건적의 난이 있는데 물자의 흐름, 정보의 교류가 원할하지 못하자 농민들의 적개심이 커지며 홍건적의 난이 발생합니다.홍건적 진압을 위해 권신 톡토를 직접 파견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조정에서는 기황후와 톡토 적대 세력 카마가 계략을 세우고 두사람의 계책이 성공하고 전쟁터에서 싸우던 톡토는 파면됩니다.톡토의 해임이 원나라의 큰 화가 되었습니다.또, 주원장의 원 압박으로 홍건적이 원을 뒤흔든 틈을 기황후 인척을 제거하니 기황후는 분노하고 복수를 하여합니다.1268년 수도 대도를 떠나 북쪽으로 대피한 순제와 기황후는 1년 반정도의 도피생활을 하며 1370년 순제는 응창이라는 곳에서 병으로 사망하고 순제 사망 후 칸이 된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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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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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자폭탄를 쏜 원인과 그 결과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맨해튼의 계획은 나치 독일의 핵개발을 우려하여 이를 선점하고자 미국, 영국 동동계획하에 추전된 것으로 실제 핵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당대의 핵무기는 시험이 되지 않은 신무기로 불발이라도 나면 추축국에게 기술만 남기는 것을 우려되는 상황이었습니다.태평양 전쟁과 중일 전쟁에서 패색이 짙던 일본제국 수뇌부는 소련을 중재자로 하고 화평공작을 펴는 중이었는데 식민지로 삼고 있던 한반도, 중국 동부, 만주, 사할린등을 포기하고 항복하자는 고노에 후미마로와 같은 강경파는 1944년부터 항복을 준비했으나 소련은 홋카이도까지 정복할 욕심을 가지고 있어 사할린이나 만주 가지고 항복을 중개할 이유가 없었으며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 정치적 상징성, 군사적 실리성으로 보면 일본 본토를 점령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화평공작은 진전이 없었습니다.1945년 7월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지만 일본 제국은 국체 보존과 천황제 유지가 불투명한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소련의 중재를 통해 조약을 체결한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 발표하니,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던 미국은 전쟁 지속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당시 일본제국은 1억총옥쇄를 외치며 저항하고 이로 인해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가 일어나며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은 몰락 직전에 앞서 일본을 압박할 새로운 수단으로 핵무기를 고려합니다. 이 이유에는 미국의 정치적 요인도 있었는데, 20억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어간 맨해튼 프로젝트가 아무런 상과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군사 비밀로서 그 사용처가 알려지지 않았던 20억을 둘러싼 정치적 후폭풍이 있으니 이에 과련된 정치인들은 국민의 혈세를 제대로 썼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습니다.미국은 3년전 둘리틀 특공대로 하여금 일본 본토를 타격한 적이 있으며, 미군은 자신의 노하우로 삼아 일본 열도를 타격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수행하게 됩니다.둘리틀 특공대의 폭격 당시의 타겟은 도쿄와 나고야 등이었지만 일본 제국에게 한방을 부순다는 것만 보여줬으며, 둘리틀 특공대로 인해 미국이 일본제국을 부술수도 있음을 보여주나 일본은 계속 미국에게 저항하고 이는 일본 제국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이 항복한 이후에도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하자 인내심이 달한 미국은 결국 일본 제국 본토에 유사이래 최대의 파괴력을 지닌 무기로 사용할수 밖에 없게되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결정됩니다.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초기 2개월에서 4개월동안 히로시마에서 90000명에서 166000명이 , 나가사키에서 60000명에서 80000명 정도가 사망하였음, 히로시마의 의료기관은 원폭투하로 60%가 섬광화상, 30% 건물잔해물, 10%기타 원인으로 사망했다는 보고가있습니다.나가사키 원폭투하 6일 후 8월15일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하고 9월2일항복문서에 사인하며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렸습니다.이 원폭투하로 인해 전후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으며 갖지 않으며 들여오지 않겠다는 비핵3원칙을 수용하고 아시아의 일본 식민지들은 자동으로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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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는 어떤시대였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경 주나라가 견융의 공격을 받아 천도한 뒤부터 기원전 221년 진에 의해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이 건국될때까지의 시기입니다.7개내외의 국가와 그 외 수많은 소국들이 천하를 두고 쟁패했던 군웅할거의 시기로 중국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입니다.부족 및 도시 국가 수준의 문명이 치열한 경쟁에 휘말리며 사회 각 분야에서 빠른 발전을 겪고,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변한 시기입니다.춘추시대에는 형식적으로나마 동주 왕실에 충성을 바치는 제후들이 많았으며, 서주 시대에서 시작된 왕-제후-대부-사-서민의 봉건제 질서도 유지되었으며, 이 시기를 주도한 인물이라고 보는 존재는 패자로, 천자에 의해 주도되던 군사적 동맹인 회맹등을 자신이 주도하며 중국의 세력가가 되었습니다.기반 계층은 대부였습니다.전국시대는 하극상이 난무하여 실력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 시대였으며 때문에, 주나라의 봉건제는 파괴되고 전국칠웅들이 각지에서 변법을 통해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면서 군현제적 질서 및 편호 제민 지배 체제가 등장합니다.난세를 극복하기 위해 제자백가의 사상들이 대두되기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에는 정치성이 반영되며 ,한자 문화권의 학문의 발달 방향 자체를 라틴어 문화권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은 시기이며 각지에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 다양한 인재들이 대두되어 사상들이 다양하게 발현되고 ,사회의 유동성이 큰 시대였음에 사 계층들이 정치참여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춘추전국시대가 지속되면서 중국의 범주가 천하로 전환되어 넓어지고 결과 황하 인근의 중화와는 다른 이민족국가 초, 오, 월, 진 등 스스로 중국에 포함된다 생각하여 중화의 테두리 안으로 진입하고 하나의 세계관이 형성되자 중국 통일에 대한 열망이 나타나며 진의 통일로 발현됩니다.춘추전국시대에 정립된 이 헤게모니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세계관 개념이 무너질때까지 2000년 넘게 지속되어 중국에서 천하통일이란 춘추전국시대에 정립된 중화 영역을 다 차지하면 완료된 것으로 봅니다.대륙 끝에 아무리 많은 이민족이 잔존해도 중화의 각 지역을 손에 넣으면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것으로 평가받았으며, 이민족들을 복속시키고 여러 땅을 차지했어도 중화의 영역에 남은 세력이 있으면 통일이 완료되지 않은 분열의 시기로 여겼습니다.
학문 /
역사
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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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상속이라는 제도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도 상속제도가 있었습니다.경국대전 형전 사천조에서 노비의 상속에 대해 규정하고 있으며 토지 등 다른 재산에도 적용되었습니다.상속재산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조업이라 하며 조선은 가산제가 아니므로 부와 모의 재산은 각자의 고유재산으로, 상속될때에도 구분되어야 하며, 부면전래, 모변전래 등으로 표기했습니다.상속재산은 우리 고유용어로 깃 으로 표현하고 생전분재가 원칙으로 부모가 생전에 연로하더나 자녀의 혼인, 과거급데 등 수시로 분재했고, 그때마다 상속문서인 분재기를 작성하였으며, 생전분재를 하지 않거나 누락된 재산에 대해서는 자녀들은 부모 3년상이 끝난 후 협의로 분재하였습니다.유언의 자유가 어느정도는 인정되었으나 남녀균분상속의 관습과 균분의식의 제한을 강력히 받아 법적상속이라 할수있습니다.상속의 범위는 혈연상속이며, 혈연상속의 예외로 제사를 지내는 자에 대해서는 봉사조 라 하며 상속이 인정되었으며, 상속인의 순서는 자녀로서 적자녀, 첩자녀, 양자녀이며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부모보다 먼저 사망한 자녀의 자손에게 대습상속이 인정되었습니다.자녀가 없는 경우에는 생존배우자가 받았으며, 배우자가 없는 경우나 자녀가 없는 경우에는 4촌 이내의 혈족, 또 이러한 상속인이 없으면 상속재산은 국가로 귀속되어야 하나 자녀가 없으면 양자를 들여 재산을 물려주거나 마을에 재산을 귀속시켜 그 재산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학문 /
역사
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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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처음으로 나온 영화는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 최초의 영화는 중국인 세탁소에서 생긴 일, 열차의 도착 이라는 두 작품이며,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했습니다.
학문 /
미술
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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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가 소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힌두교는 인도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이며, 윤회와, 업, 해탈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입니다.인도에는 카스트제도라는 신분제가 있는데, 여기서 제일 높은 계급인 브라만은 과거 소를 힌두교에서 받드는 신 중 한명인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운송수단이라 생각하여 소를 신성한 가축으로 여겼습니다.또, 인도의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이 확대되면서 소가 농기구의 하나인 쟁기를 끌도록 와주며, 소의 배설물은 비료로 사용이 가능합니다.이러한 상황에서 소고기를 먹게되면 소가 줄어들어 농경생활이 위협을 받을 거라는 사람들의 인식으로 힌두교에서는 소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학문 /
미술
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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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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