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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임금과 어진 신하와 충신들 사후 시호가 붙혀져 후대사람들에 귀감이되어 전해져오는데요 시호가 붙게 되는 연유가 무엇인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시호는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 그 행적에 따라 임금으로부터 받은 이름입니다.죽은 이의 삶이나 업적을 평가하고 기리기 위해 생겼으며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시호에 사용되는 글자들에는 모두 엄격한 의미가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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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를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시회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합니다.내가 돈이 많다는 가정하에 그림을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만약 돈이 많아 작품을 살수 있다면 나는 어떤 작품을 살것인가의 시점에서 작품을 눈여겨 보기도 하고,작품에 대한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가서 내가 아는 정보와 비교함으로써 생각을 더 풍부하게 하는 방법,작품과 나의 삶을 연관지어 생각해 보는 법, 작품의 시대적 상황과 나의 현재 상황을 비교해 보기, 작품과 다른 사람들의 시점 비교해보기 등 아주 많습니다.
학문 /
미술
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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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시대에 없는 중세시대만의 특징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세시대에는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사실적 재현은 배제하고 상징성이 강한 양식이 발달합니다.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새로 나타난 로마네스크 양식이 계속되었고, 봉건제도와 기사도 정신이 여자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쳐 보석이나 의복으로 신분을 나타내고 기사도의 충절과 용맹, 부인을 존경하며 약자를 돕는 정신이 여성의 미를 예찬한 것에 바탕을 두었습니다.의복도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화려한 복식과 몸에 밀착되는 형태 등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학문 /
역사
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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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의 기원, 역사적 변천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설의 기원은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중국의 역사서 수서, 구당서에 신라인들이 원일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는 기록은 있습니다.하지만, 설 명절이 역법체계에 따른다는것을 보면 이전부터 설이 존재했다 짐작합니다.3세기에 나온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제천의례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은정월, 5월, 10월의 농공시필기 등과 같은 표현이 있기 때문이며 은정월은 은나라의 역법을 지칭하는데 이는 음력섣달을 뜻합니다.우리나라의 설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기록은 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서에서 찾아볼수있는데, 수서와 구당서에 신라 관련 기록에는 매년 정월 원단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고려사에서도 설날은 상원, 상사, 한식, 단오, 추석, 중구, 팔관, 동지와 함께 9대 속절의 하나로 기록되어있으며 조선시대에는 한식, 단오, 추석과 더불어 4대 명절의 하나였습니다.현재는 음력설과 양력설로 나뉘며 음력설은 전통적인 명절로 설날이며, 양력설은 현재 일상력으로 사용하는 태양력에 의한 설 입니다.1896년 1월1일에 태양력이 수용되고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은 이어졌으나 일제강점기가 되며 수난의 역사가 시작됩니다.일본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설날과 같은 세시명절을 압박하고 일본 명절인 천장절, 명치절 등을 국경일로 지정하여 한국인을 행사에 참가시켰습니다.광복후 우리 스스로의 정부가 들어서지만 설에 대해 이중과세라는 낭비성만을 강조하였지만 국가가 아무리 신정을 강요해도 일반인들은 설날을 명절로 여기고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본명인 설날을 찾게 됩니다.오늘날 설날 무렵이면 추석과 함께 민족대이동이 주목되는데 명절 연휴에 고향을 찾는 인파가 많기 때문이며, 근래에는 어른들이 자녀를 찾는 역류현상도 일었지만 아직은 고향을 찾는 인구가 많습니다.오늘날 설은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의미와 만남을 갖는 시간이 된다는 측면이 중요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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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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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왜 자신의 귀를 잘랐을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흐가 귀를 자른것에 대한 이유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고갱과의 싸움이 원인인데, 고흐와 고갱은 한때 한 지붕 아래 생활을 공유하였는데 고흐를 후원하고 돌보던 테오는 고흐에게 지쳐있던 상태였으며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고갱은 화상이었던 테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테오의 요청으로 고갱은 고흐와 교류를 하고 예술관을 교류하다 서로의 자화상을 교류하는등 한 지붕 아래 예술 공동생활을 합니다.서로의 예술세계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고흐는 내성적이고, 격정적인 인물이었고 고갱은 냉소적이고 완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서로 다툼이 있었고 고갱은 고흐와의 공유생활을 마무리 짓기로 하자 고흐는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고갱으로부터 욕을 들었던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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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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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6부라는건 무슨조직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2성 6부는 고려시대 나라를 다스리는 관리체제입니다.중서문하성, 상서성의 2성과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의 6부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중서문하성에서 가장 높은 직급을 문하시중이라 하며, 재신(국가 정책 심의 업무, 중서문하성에서 2품 이상의 높은 관리) 낭사( 언론업무, 중서문하성에서 3품 이하의 관리) 구성되어있습니다.상서성은 6부로 구성되어지는데, 중추원-추밀(2품 이상의 고위 직급으로 국군기무 업무), 승선(3품 직급으로 비서업무),어사대(감찰 기능), 삼사(회계 기능) 으로 구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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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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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뚱이 요동땅이 조선의 땅이라고 했다던데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북한과 중국이 베이징을 방문했을때 마오쩌둥은 당신들 선조는 영토가 요하를 경계로 한다고 말했으며, 당신들은 압록강변까지 밀려서 쫓겨왔다 생각한다, 당신들이 역사를 기술할때 이것을 써야 한다고 합니다.이는 중국 지도자가 본래 요동은 한반도의 땅임을 인정한 것이지만 2002년부터 고구려, 발해를 중국의 지방국가라 주장하는 행위에 반대되는 행위입니다.마오쩌둥은 북중 국격조약 체결 후 북한의 최용건 위언장을 만나 또 한번 얘기합니다.당신들의 경계는 요하 동쪽인데, 봉건주의가 조선사람들을 압록강변으로 내몬 것이다. 이에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도 역사는 왜곡할수 없다,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땅이었으며 심지어 예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다. 이는 터무니 없는 말이다 라고 합니다.고구려, 발해 등 조선 선조들의 영토였으나, 중국의 봉건왕조의 침략으로 빼앗긴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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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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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선생의 시신은 왜 아직 조국으로 못오고 있죠?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시도했으나 암살당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유해 발굴에 호의적이던 장제스가 국공내전에서 패전 후 공산 중국의 성립과 6.25전쟁, 냉전으로 중국과 교류가 끊기다시피해 한국 측 주도로 찾는 것은 사실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현재 안중근 매장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둥산포, 원보산, 뤼순감옥 박물관 부지 등 3곳이며, 특히 원보산은 당시 뤼순감옥 전옥인 쿠리하라 사다키치의 딸 이마이 후사코의 증언 등을 토대로 2006년 남북공동조사단 등이 공식지목되었습니다.공산화된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한 북한의 경우 안중근을 높게 평한 김일성은 1970년대에 직접 주석 명령을 내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 씨를 단장으로 하여 조사를 벌였고, 1986년에도 북한은 대규모 유해 발굴단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고 하나 둘 다 실패했습니다.또한 뤼순 주변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여러차례 개간되어 이미 1910년대의 흔적은 찾을수가 없으며, 2008년 남북공동으로 진행한 발굴 사업에서도 유해를 찾지 못하며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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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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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단종을 복권시킨 이유??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숙종이 단종을 복권시킨것은 주도적인 것은 아니였으며 정치권의 주류인 서인의 의견이 컸습니다.세조의 왕위탈찬은 세월이 흘러 단종을 복권 시켜도 큰 이견이나 불상사는 없었을것이며, 단종은 억울하게 죽은 것이니 세조의 자손으로 옛 잘못을 반성한다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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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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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부터 시작된 가부장제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부장제는 남성 연장자가 가정을 이끄는 제도로 부권제라고도 합니다.농업 및 산업의 시대를 지나 점차 개인주의의 사회로 변화하며 현대에는 남성만의 통솔력 및 독점적 힘이 약화되어가는 추세입니다.현대 사회는 아직까지 완전히 육체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세대적으로도 기성세대들은 대부분 남성이 가정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 청장년층은 서서히 맞벌이로 바뀌어가는 등의 이유가 있으며, 2010년 후반 남성혐보적 페미니스트, 기성세대 정치인, 젠더 문제 등이 합쳐지며 성별에 상관없이 함께 타파해야 할 문제라고 보고있는 추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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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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