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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부리 영감 설화가 한국에서 발생한 설화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혹부리 영감을 한국의 전래동화로 보지 않는 것은 13세기 쓰여진 일본 고대 설화집인 우치습유물어와 오상내의초에 혹부리 영감이 이미 수록되어있고 일제가 국어 교과 과정을 개정할 때 우리 민담의 성향과 같은 일본의 특징적인 민담을 수록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였으며 혹부이 영감과 방망이 얻기는 같은 도깨비담이라도 내용이 다르며 한국 도깨비 담에서 늙은 부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또 혹부리 영감이 한국 내에서 전승되고 있지만 수집된 입말 본이 극히 적다는 점 입니다.그러나 한국에서 전승되어온 설화로 보는 주장도 있는데13세기 무렵에 나온 일본 고대 설화집에 혹부리 영감이 실려있다고 해서 혹부리 영감을 일본에서 비롯한 설화로 단정할수는 없는 점,혹부리영감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설화가 무수히 발견되는 세계광포설화여서 그 근원을 따지기 힘든점, 9세기 중엽 당나라의 단성식이 쓴 기담집 유양잡조에 수록된 방이설화의 내용에서 혹부리 영감과 유사한 전개가 나타나고 이 방이설화는 당나라의 문헌이지만 신라에서 전해진 이야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또 한국 최초의 민담집인 조선동화집에 혹부리 영감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민담의 수집자는 이 이야기가 일본에 잘 알려진 혹부리 영감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분명 조선에서 채집한 이야기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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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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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적의 난은 왜 일어난건지?.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170년 고려 중기에 일어난 무신의 난은 당시 정치혼란과 더불어 신분계급에 큰 변동을 일으켜 하극상의 풍조가 팽배했고 중앙정부는 정치투쟁과 권력다툼으로 관리 기능이 약화되었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 하층민에 대한 과중한 세금과 착취가 심각해집니다.결국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사이 충돌이 일어나고 농민과 노비에 의한 반란까지 유발, 그 중 가장 대규모적이고 목적이 뚜렷한 것이 만적의 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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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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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와 일본의 청일전쟁시 우리나라는 어떠한 피해를 받았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월 중순부터 일본이 점령한 인천과 서울을 시작으로 피란민이 발생, 경복궁 점령 이후 6~8할의 서울 주민이 피란합니다.평안도에서는 청군의 남하로 많은 평양도민이 황해도로 피란, 청일 양군은 군량 보급없이 현지 조달로 이뤄져 경기, 충청, 평양에서 쌀과 목재 등 생필품의 가격이 7~9월간 2배에서 5배로 폭등, 9월부터는 석유를 포함해 생필품의 거래가 끊겼으며 8월부터 성환에서 패배해 북상하는 청군과 원산에 상륙한 일본군의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특히 양군의 물자약탈과 노동 징발로 평양주민의 피해가 극심했으며 이후 평안도 경제가 파탄나고 세입이 전혀 되지 않아 극심한 재정난을 초래, 일본에 반기를 든 2차 동학농민운동은 일본 지휘하의 조선 관군들이 소탕했는데 여기서는 삼남 지방의 세입 체제가 붕괴되며 이때 벌어진 재정난은 대한제국 초창기까지 지속될 정도로 수년동안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일본은 1년 뒤인 1895년 러시아와 연대하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뒤 물러났던 친일내각을 재집권시켰고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이렇게 러시아와 일본이 대립한 가운데 1897년 대한제국이 건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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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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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원나라가 빠르게 멸망한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나라가 빠르게 망한 이유는 빼앗은 땅을 관리하기 위해 막대한 병력을 상주시켜야 하는데 도시를 모두 불태우고 학살함으로 인해 그 지역을 차지함으로서 얻는 이익이 없었고, 이익이 없으니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이 다 손실로 잡혔기 때문입니다.확장 당시 이런식의 초토화 정책을 펼치면 빠른 확장은 가능하나 초토화 시킨 덕분에 정복한 땅에서 얻을것이 거의 없었고, 결국 점령지를 자발적으로 토해내고 본거지로 후퇴한 후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이 다시 재화를 재건하길 기다려 다시 재점령을 하러 들어가는 일종의 약탈경제를 실시, 이는 유목민의 전통적인 방법이었습니다.문제는 이 약탈을 위해 그 약탈할 재화를 모을 시간을 상대에게 줘야했고, 성공적으로 약탈을 하면 좋지만 그 시간동안 상대가 병력을 양성해 막아버리면 약탈이 실패하게 되고 피해를 입을 수 도 있다는 것입니다.이렇게 약화되기 시작하면 주변국 전부가 자신들에게 주기적으로 약탈되던 국가기 때문에 협공을 받아 순식간에 무너질 가능성은 매우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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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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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노동조합은 언제 생겼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최초의 노동조합은 17세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결성한 우애조합, 공제조합 등이었습니다.1799년 단결금지법을 제정해 노동조합의 결성을 금지하였으므로 이들 조직은 비밀 결사의 형태를 띠었고 초기 노동조합의 주요활동은 일정한 조합비를 걷었다가 사고가 발생 시 지급하는 일종의 상호부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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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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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의 역사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탐라국은 지금의 제주도에 있던 옛 나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 초까지 오랫동안 불려졌습니다.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제주도 3성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의 15세손 고후, 고청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에 이르렀는데 이때는 신라 성시였고,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는 성주, 둘째에게는 왕자, 막내에게 도내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했다고 합니다.이에서 탐라국이라는 명칭이 유래, 실제로는 섬나라 라는 뜻 입니다.성립연대는 신라 성시라는 시기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이므로 문무왕때로 추정, 그 이전의 사회는 3성씨족의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 씨족이 군장으로 군림해 국주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설화에 의하면 처음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등 3성의 시조가 모흥혈에서 나타나자 그 자손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고 하며 사람은 키가 조금 작고 언어는 한과같지 않고 비루하며 여름에는 초옥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에 산다고 합니다.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조에는 주호 라고 지짗, 배를 타고 중국과 한에 내왕하며 교역했다고 합니다.대외관계는 제일 먼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백제와 밀접해 476년 4월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치고 그 사신은 좌평의 관등을 받았으며 198년 8월 공부를 바치지 않다가 백제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부를 바칠 것을 약속합니다.고구려와는 가옥을 수출하는 등 교역을 했으나 백제에 복속된 이후로는 교섭이 두절, 신라와는 662년 2월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이 와서 함복함으로써 이때부터 신라의 속국이 되었으며 위에 일본과 가깝게 지내다 678년 2월 신라 사신의 경략을 받고 뒤로는 신라와 활발하게 교섭했습니다.한편 중국 당나라와는 661년 8월 왕 유리도라가 사신을 보내기도했으며 일본과는 66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일본사신의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했다가 귀국할 때 왕자 이파기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에 간 일이 있은 뒤로 매우 교섭이 활발해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녀왔으며 680년 9월과 686년 8월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신라 말기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신진세력인 고려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 11월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고 938년 12월 탐라국주 고자견이 태자 말로를 파견해 입조하고 고려로부터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 왕자의 작위를 받아 고려의 번국으로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했고 1105년 고려의 지방행정구획인 1개의 군으로 개편되면서 반독립적인 체제는 사라졌습니다.1153년 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이 된 뒤로는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이 탐라의 행정업무를 관장, 이에 탐라국 체제는 없어지고 성주와 왕자의 관직만이 남아 상징적 존재로 유지됩니다.조선이 건국 후 1404년 5월 성주는 좌도지관, 왕자는 우도지관으로 개칭되어 존속하다가 1445년 6월 이마저 폐지되어 이 때부터 탐라의 귀족계급은 완전히 평민화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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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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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껍데기인 석패를 이용하는 나전칠기는 어느시대에 시작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개를 이용해 장식한 물건 중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은 수메르 문명의 왕릉에서 출토한 우르의 군기와 우르의 전승기념비 입니다.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중국에서는 상나라 때부터 나전칠기를 만들고 당나라 시기 많이 만들었다고 하며 한국에서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평탈기법에 가까운 나전칠기를 발견, 삼국사기에 칠전이라고 하는 관청이 신라에 있다고 기록한 바, 삼국시대엔 나전칠기를 널리 제작하고 있지 않았나 짐작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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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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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칠기는 우리나라에서만 있는ㅈ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전칠기는 예부터 한국, 중국, 일본에서 제작한 것으로 삼국 공통으로 나전이라 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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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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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신석기 시대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석기시대는 돌로 만든 도구를 기준으로 삼은 것인데 인류가 기존의 뗀석기 대신 간석기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만든 도구를 많이 사용하자 구석기와 신석기로 시기를 구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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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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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매국노라고 불린 이유가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완용을 을사늑약을 적극 추진한 공으로 내각총리 대신이 되어 매국 내각의 수반이 되었으며 고종의 양위, 한국 군대 해산 등을 주도했기 때문이며, 1910년 순종을 압박해 협병조칙을 받아낸 공로로 백작 작위까지 얻어낸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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