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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 1제국의 원수였던 기욤 마리 안 브륀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욤 마리안 브륀은 프랑스 나폴레옹 시대의 원수로 처음 문필활동에 뜻을 두어 프랑스 파리에서 혁명지도자 조르주 당통과 친교를 맺고 소책자를 내주었습니다.뒤이어 북부군 숙청작업 책임위원이 되었고 공포정치체제의 관리들을 보르도로 이송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1792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절친한 친구 랑발 부인 살해사건에 연관되어 죽임을 당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파리에서 폴 바라스 및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함께 일했고 1797년 이탈리아에서 3개월간 복무한 후 사단장이 되었으며 바라스는 브륀의 힘을 빌어 헬베티아 공화국과 주기 치살피나, 바타비아 공화국을 프랑스에 복속시켰으며 1799년 9~10월 네덜란드 베르헨 전투와 카스트리큉 전투에서 영국-러시아 동맹군을 무찔렀습니다.1800년 12월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고 1804년 원수가 되었습니다. 1807년 슈트랄준트에서 스웨덴을 몰아냈고 1815년 백일천하때 프로방스를 지켰으나 백일천하 사태 평정 후 아비뇽에서 성난 군중들에게 습격을 받아 암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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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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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26인의 원수 중 한명인 도미니크 카트린 드 페리뇽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페리뇽은 1754년 5월 31일 툴르즈 근처 소도시 그르나드에서 장 베르나르 드 페리뇽과 마리 디라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페리뇽 일가는 16세기 경 툴루즈 인근에 정착, 대대로 행정관과 법조인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었습니다. 페리뇽 또한 법조인이 되기 위한 콜레주에서 공부를 시작, 콜레주를 졸업한 페리뇽은 생각을 바꾸어 1775년 기옌의 왕립척탄병대에 입대하지만 평민 출신이라 높은 계급까지 진급할수 없다는데 낙담한 그는 1783년 전역해 고향으로 돌아와 낙향한 뒤 가문이 소유한 토지들을 관리하며 지냅니다.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페리뇽은 국민위병의 중령으로 선출, 1791년 입법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나 혁명파 간의 정치적 다툼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루시용전쟁에 참전, 동피레네군에 소속되어 페르스토르트 전투와 불루 전투, 시에라네그라 전투 등에서 공을 세운 그는 사령관 자크 프랑수아 뒤고미에 장군이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동피레네군 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그는 1794년 말 피게레스를 점령하고 이듬해 초로세스 요새 수비군의 항복을 받아내나 더 이상의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5월 29일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됩니다.10월 16일 페리뇽은 다시 500인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1월 24일 주에스파냐 대사로 임명되었고 그는 제 2차 산일데폰소 조약의 체결에 일조했습니다.1797년 11월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10월 군에 복귀하여 이탈리아 방면군에 배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8월 15일 노비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패, 주베르는 전사했고, 페리뇽은 포로로 잡혀 1년 동안 억류되어있어야 했습니다.1801년 11월 18일 페리뇽은 건강이 나빠져 퇴역, 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페리뇽의 행정적 능력을 높이 사 그를 상원의원으로 임명하고 몇가지 외교 업무를 맡겼으며 페리뇽 역시 나폴레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1804년 5월 19일 페리뇽은 프랑스 제국원수로 임명, 1806년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군정총독으로 임명되어 1808년 나폴레옹 군정총독이 되어 국왕 조아킴 뮈라를 보좌 겸 감시했으나 1814년 1월 뮈라가 나폴레옹을 완전히 배신하자 페리뇽은 더 이상 나폴리에 머무를 수 없었고 ,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고향에 칩거합니다.페리뇽은 아르투아 백작의 천거를 받아 왕정 하에 제 1군관구 사령관과 10군관구 사령관 등의 직책을 맡아 보았으며,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의 편을 들지 않았고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완전히 추방된 뒤 루이 18세는 페리뇽을 우대해 그를 파리 군정총독으로 임명하고 후작위를 내렸습니다.1818년 9월 페리뇽은 심한 통풍과 지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고 그 해 12월 25일 뇌줄중으로 사망,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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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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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군인이었던 장 마티유 필리세르 세뤼리에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742년 112월 27일 프랑스 레옹에서 출생, 중간층 귀족가문에서 태어났고 1755년 민병대에 입대해 중위가 되었습니다.1778년 대위가 되었고 1789년 메도크 지방 초병대의 사령관이 되었다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귀족 출신인 세뤼리에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이었으나 다행히 목숨과 지위는 보전, 그러던 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부관이 되었고 나폴레옹과 함께 싸우면서 점차 그의 전술에 크게 감탄, 나폴레옹 역시 세뤼리에의 고결함을 높이 평가합니다.그 뒤로 승승장구하다 1804년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에 의해 원수가 됩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해가기 시작하고 1814년 3월 31일 동맹국이 파리에 도착하자 1,417개의 군단기들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검을 적의 손에 넘기지 않기 위해 불태웠고 그 후 다시 나폴레옹이 복위하자 이번에는 나폴레옹에게 붙었지만 나폴레옹은 그의 모든 활동을 차단,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패하자 그는 입장을 바꿔 루이 18세를 지지해 목숨은 건지지만 백작 작위는 반납, 1819년 1월 1일 프랑스 명예원수로 임명되었지만 1819년 2월 25일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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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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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쇼군되려고 임진왜란 일으켰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겐지는 커녕 천출인 이유로 상례적으로 쇼군이 될수 없었습니다. 그가 쇼군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자신들의 영토를 회복하고 그를 방해하는 오랑캐를 물리쳐 승전군이 되어 천황에게 다시 대장군의 칭호를 받아 막부를 구성하는 것뿐.이를 위해 과거 영토라고 주장하는 미나미에 해당하는 조선 남부를 회복하고 이에 반대하는 명나라 군대를 섬멸하는 것만이 막부를 구성하고 쇼군이 될 명분을 얻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영지들을 무사들에게 하사함으로써 천출인 이유로 늘 불안했던 가신관계를 굳건히 만들고자 해 임진왜란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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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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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발달하지 않은 아주 오래전엔 어떻게 의사표현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구석기 시대에는 동물처럼 아주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으로 짐작됩니다.사용하는 문자가 없어 소리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문자만 없었지 언어소통은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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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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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불가사의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 7대 불가사의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인들이 당대 기준 신기한 건축물 들을 선정한 것입니다.즉, 당대에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낸 가장 기적적인 건축물 7가지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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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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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 근대미술 작가와 작품으로는 이중섭- 애들과 물고기와 게, 고희동 - 정자관을 쓴 자화상, 이종우- 누드 남자, 장욱진 - 독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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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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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최초의 궁은 언제 지어 졌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의 궁은 안악궁 입니다.장수왕 15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건축한 궁궐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한국에 있던 궁궐 중 가장 면적이 넓으며 단일 건축물의 면적도 최대 수준궁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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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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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화폐의 기준은 어떻게 나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화폐단위 기준은 양이었고 전은 보조적인 화폐단위로 10푼은 1전, 10전은 1냥, 10냥은 1관이라는 계산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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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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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왜 핵폭탄을 먼저 준비했으면서 개발은 늦어진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38년 핵분열 현상이 발견되자 당시 나치 독일은 전쟁을 준비하면서 핵분열현상이 무기로 쓰일 수있음을 알아채고 물리학자들을 초빙해 우란페어라인을 조직해 핵분열의 무기화, 무기이용가능성을 연구하지만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이들을 군에 동원하는 바람에 계획이 중단됩니다.일시 중단된 핵무기개발 계획은 폴란드 침공이 시작된 1939년 9월 1일 다시 시작되게 됩니다.나치 독일은 벨기에에서 4천톤의 우라늄 광석을 채굴, 이 중수탱크는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측에서 특공대를 보내 폭파, 중수를 이동하는 배도 같이 수장하며 연구에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또 독일과학자들은 감속재로 중수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데 실제 흑연도 사용할수 있었으나 흑연은 일부 과학자들의 잘못된 실험 결과로 조기에 배제됩니다. 또 국력 문제때문에 실제 핵무기 개발에 이르기도 어려웠고, 미국이 우려하고 있던 바와 달리 히틀러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핵물리학을 연구하던 유대인 학자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계에서 강제 추방, 결과적으로 핵물리학에 대한 투자 자체가 빈약해진 상태였습니다.또 핵물리학 연구의 기본 장비랄수있는 사이클로트론조타 없어 1942년 군수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가 세계최대급 사이클로트론 건설 예산을 주겠다고 제안하자 연구팀은 오히려 아직은 제대로 만들수 없으니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고 했으며 결국 종전때까지 나치 독일이 사용할 수있었던 사이클로트론은 프랑스 점령지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단 1개뿐이었습니다.가장 문제가 된 것은 비효율적인 반응로 설계 문제로, 이 반응로는 하이젠베르크 작품이었는데 그는 이 설계도를 고의로 연합국에 노출시킴으로 독일의 핵개발 계획을 세계에 알린 장본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반응로가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임계상태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사실보다 독일이 핵분열 에너지를 이용하려 한다는 우려가 절대적으로 고평가되었고 이 문제로 일부 학자들은 하이젠베르크가 독일의 핵개발 능력이 생각보다 형편없다는 것을 연합국에 알리려 했다가 역효과만 부른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습니다.그 결과 독일이 벨기에에서 손에 넣었던 천연우라늄 및 광석 전량이 처음 독일 손에 들어갔을 때 상태 그대로 미국의 수중에 떨어질 정도로 독일은 핵무기 또는 핵에너지 개발에 기초적인 접근조차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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