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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전과 정전을 지급한 사실이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인건가요? 또한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왕권 강화정책의 일환입니다. 녹읍을 주었다는 것은 통일신라 귀족에게 국가 대신 그땅에서 나는 것에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입니다. 이것은 지방 귀족들이 병사를 기를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이에 신문왕은 관료전과 정전을 내려서 귀족들에게 국가가 조세를 걷어 녹봉을 지급했고 이로 인하여 왕권이 강화되었고 신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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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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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힘이 없어 일본에게 침략당했다는 역사사관은 정당한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우리가 일본에 비해 근대화가 늦어서 국권이 침탈 당한 것이 맞습니다. 다시 이러한 역사를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힘을 길러야 합니다. 외교력은 국방력에서 나옵니다. 더불어 동북아 힘의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과거의 일은과거사 대로 풀고 미래의 일은 미래의 일 대로 한 미 일이 협력하여 동북아 힘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힘의 균형이 깨지면또다시 가혹한 역사를 되풀이 되게 됨으로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과거사를 접어 두자는 말이 아니라 투 트랙으로 접근해야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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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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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겉보리 서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안한다는 말의 뜻이 뭔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그만큼 데릴사위의 신세가 처량하다는 뜻입니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 해서처가에 가면 전통적으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처가에서 더부살이를 하면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고 마음이 불편하여편하게 살지 못하여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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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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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에서 인구, 경제대국인 송나라가 변방의 금나라에게 멸망한 원인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송나라는 무 보다 문을 숭배하였습니다. 점차 국방력은 약화 되었고 나라를 지킬 힘 조차 잃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상황과 비슷하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상무정신은 없고 군대에는 빠지려고만 했고 황제는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 있었고 문관들만대우해 주는 세상 이었습니다. 당연히 기동력과 무력을 갖춘 금나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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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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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렴주구라는 사자성어는 어디에서 유래되었나요?
가혹(苛酷)하게 세금(稅金)을 거두거나 백성(百姓)의 재물(財物)을 억지로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유래는 아래와 같습니다.공자(孔子)가 제자(弟子)들을 데리고 태산(泰山) 기슭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한 여인(女人)이 세 개의 무덤 앞에서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수레 위에서 이 소리를 듣고 있던 공자(孔子)는 제자(弟子) 자로(子路)에게 그 까닭을 물어 보라고 했다. 자로(子路)는 여인(女人)에게 다가가서 정중(鄭重)히 입을 열었다. 「당신(當身)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굉장히 슬픈 일을 당하신 것 같은데 무슨 일이신지요?」 여인(女人)은 더욱 흐느껴 울며 이렇게 말했다. 「옛적에 시아버지가 호랑이한테 잡아 먹혔고 나의 남편(男便)도 또 호랑이에게 당했는데, 이제 나의 아들이 또 그것에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곳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하니 「이곳은 세금(稅金)을 혹독(酷毒)하게 징수(徵收)하거나 부역(負役)을 강요(強要)하는 일이 없습니다.」 자로(子路)에게 이 말을 전해 들은 공자(孔子)는 제자(弟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자(弟子)들아 이를 들어라. 가혹(苛酷)한 정치(政治)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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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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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에서 소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힌두교도는 소에 3억3,000만의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고 힌두교 나라인 인도에서 소를 도축하는 것은 친족 살해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이것은 고대 인도에서 부터 농경을 시작한 인도인은 소를 죽여서 얻는 이익(고기)과 살려서 얻는 이익(노동력, 우유ㆍ버터 등 유제품, 거름, 쇠똥을 이용한 연료, 수소의 어미)을 따져봤을 것이다. 식용보다는 사육이 훨씬 더 남는 장사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후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 수소를 시바신의 상징, 암소를 크리슈나신의 시종으로 치는 힌두교가 득세하면서 5세기 이후 인도에서 쇠고기 금식이 자연스레 뿌리를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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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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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에서 호민관, 집정관, 원로원은 각각 어떤권한과 역할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1. 호민관 : 고대 로마에서 평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평민 중에서 선출한 관직2. 집정관: 정무관 중 최고 지위이며, 행정 및 군사의 대권을 장악하고 원로원과 합하여 민회를 소집하는 권한을 가진다. 임기는 1년이며 한 달씩 교대로 집무하며, 상호간의 합의 하에 업무를 본다.(상호견제와 균형을 유지, 권력의 집중방지). 비상시 한 사람의 독재관(dictator)에게 전권을 위임(6개월을 넘지 못함)3. 원로원: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가 설치하여 로마 건국 때부터 존재하였다고 한다. 왕정(王政) 때 씨족(氏族)의 장로(長老)로 구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원로원 > 집정관 > 호민관 순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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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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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탕평책이 대두하게 된 계기와 한계점에 대해 아시는분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탕평론을 처음 제기한 왕은 숙종입니다. 붕당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그 해결책으로 고안해 낸 것입니다. 이 당시 정국은 서인이 보수적인 노론과 진보적인 소론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숙종이 군왕과 신하가 한마음으로 절의와 덕행을 숭상하면서 인사 관리를 공정하게 처리하면 정치적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 제시한 것입니다.하지만 숙종의 탕평책은 이름뿐이었습니다. 숙종의 인사 정책은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붕당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조처였기 때문입니다. 경신환국 · 기사환국 · 갑술환국 등이 그의 탕평론의 한계를 그대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숙종은 말년에 이르러 외척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또한 노론 전제화가 추진되어 탕평론은 온데간데 없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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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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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정치적인 야망이 꽤 많았다고 하는데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에 경기도 여주에서 부친 민치록과 모친 한창부부인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8세 때 부친이 타계한 뒤,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감고당(感古堂)에 와서 살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친정집이었습니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타계하자, 조대비의 명에 의해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이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3년 뒤인 1866년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의 역할에 의해 16세 때 왕비로 간택되었습니다.고종 즉위 이후 10년 동안은 어린 국왕을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년이 되면서 직접 정사를 보고자 하는 고종의 욕망과 이를 지지하는 척족 인물들과 재야의 여론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고종과 왕비는 개화정책을 추구하였으나, 안에서는 보수유생, 구식군대, 급진개화파, 동학농민군의 도전에 직면하였고, 밖으로는 청국의 강화된 내정간섭으로 국정이 표류하였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 명성황후는 임오군란 당시 궁중을 탈출했다가 환궁하였고, 갑신정변 당시는 기지를 발휘하여 거사를 무위에 그치게 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이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틈타 일본이 무단으로 조선에 파병하여 경복궁을 침략, 조선 조정을 장악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궁중에 연금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러시아 주도의 삼국간섭에 의해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였습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대한 접근을 통해 군주권 회복을 추구하였고, 조선 보호국화가 좌절된 일본정부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공사로 파견하였습니다. 이처럼 내외의 격동 속에 고종을 적극 내조해 왔으나, 이로부터 한 달 여 뒤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야만적으로 살해하였습니다.사건 직후 일본 정계의 요인과 외교관, 기쿠치 겐죠[菊池謙讓] 등 언론인은 명성황후가 부패의 화신으로서 조선을 망친 ‘궁중의 암탉’이며, 이 사건을 흥선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의 범죄로 덮어 씌웠습니다. 미우라 공사는 ‘흥선대원군의 요청에 응하여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궁궐에 도착해 보니 사건은 일단락된 뒤였다. 이 사건과 일본 군민은 무관하다’하였습니다. Japan Daily Mail 등 일본의 영자신문은 이 사건을 ‘중세의 야만왕조’인 조선 궁중의 암투에서 빚어진 것으로 호도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의 왜곡은 일제하에도 지속되었습니다.명성황후를 직접 대면했던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의 부인 혹은 비숍 같은 영국인 여행가의 기록은 일본 측과 달리 명성황후에 대한 긍정적 서술이 적지 않습니다. 명성황후는 궁중 여성으로서는 동양의 고전에 밝았고, 서양의 종교와 풍속, 정치와 의회제도, 여성의 교육과 지위 등에 관심이 지대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지적이고 개화된 궁중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는 유가적 소양과 서양의 문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과 왕실, 군주와 국가의 활로를 추구하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모’이자 근대형의 여성정치가로서 재평가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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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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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반대한 사람은 최만리 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최만리만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당시 조선은 중국을 사대하고 있었습니다. 속국까지는 아니지만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있었지요. 당시 명나라는 조선이 자신의 글자를 가지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그들의 세계관에서는 명나라만이 하늘을 관측 할 수 있고 글자를 가질 수 있고 중국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중국의 것을 도용하여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부정하고 한글을 만들면 조선에 국난이 올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이를 경계하고반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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