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많이 보는 책은 어떤 책 신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난 50년간의 통계를 바탕으로 한 Squidoo.com가 집계한 통계를 바탕으로 정리한 이 인포그래픽을 보면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성경 이였습니다. 성경은 39억권이나 출판되면서 탑 10 안의 다른 모든 책을 합한 것보다 많은 월등한 출판량으로 1위의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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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는 왼손을 못 쓴다는데 왼손잡이는 어떻게 하나요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대부분 흰두교를 믿지요. 이슬람교나 힌두교에서는 지금도 '왼손은 부정(不淨)하다'고 여겨 오른손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올바른 매너로 여기고 있는데요. 이는 예언자 마호 메트의 언행록에 먹을 때는 오른손으로 먹으라고 기록된 데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아기가 태어났을 때 무조건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습관을 어릴떄 부터 들여 줍니다. 그리고 화장실 가서 대변을 보고 닦는 손은 왼손이라는 것을 어릴 때 부터 교육을 시켜 줍니다. 그래서 아무리 왼속 잡이라도 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오른손으로 먹게 하지요. 결국 종교적인 원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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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중국은 왜 사이가 좋지 않은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래 이전에는 중국과 인도는 사이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1951년 중국이 티베트를 병합하며 국경을 맞닿게 되자 갑자기 껄끄러워집니다. . 중국이 티베트를 합병하자, 인도의 네루 총리는 망명 티베트인들을 다람살라정착시켰으며, 독립 후 1950년대 영 연방 인도령 내에 반독립 상태로 있던 히말라야 방면의 여러 소국들을 합병하면서 부탄을 경계로 중인 양국은 군사적으로 대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서로 급격히 사이가 나빠졌으며, 결과적으로 1962년 중국-인도전잰이 발발하여 총 칼을 맞대게 되지요. 이후 인도는 중국과 사이가 나쁜 소련과, 중국은 인도와 사이가 나쁜 파키스탄과 편을 갈라 대치했고, 교류가 사실상 중단되고 그것이 현재 까지 이르게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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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사람들은 서로 말이 통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 간에 의사소통이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삼국 간에는 사신이 수시로 교환 되었다고 하지요. 과연 이들이 사용한 말과 글은 ‘한자’만으로 교신했을까요?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록들을 보면 <삼국사기>는 삼국 간의 접촉을 기술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표현은 파사 이사금 26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고구려 동천왕 22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등의 표현 입니다. 이 사례들은 이들이 어떤 ‘말’이나 ‘글’로 의사소통을 했는지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보면 " 내물왕 18년 ‘백제왕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百濟王移書曰]’, ‘우리 왕이 ‘대답해 말하기를[答曰]’, 눌지왕 34년 ‘고구려 사자가 와서 말로 통고하기를[使來告曰]’, 고구려 장수왕 12년 신라의 사신을 ‘왕이 특별히 두텁게 위로했다.[王勞慰之特厚]’, 백제 개로왕 21년 고구려 승려 도림이 ‘문 앞에서 고하기를[詣王門告曰]’, ‘왕을 모시고 앉아 조용히 말하기를[從容曰]’ 등등에서 표현 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삼국 간에 어느 정도 의사 표현이 자유 스러웠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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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간에 기별이 안간다라고 말할까요 ? 음식은 위로 들어가잖아요 정확한 뜻이.궁금해여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뜻은 그대로 해석하면 '간에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다' 정도로 볼 수 있는데요. 음식을 먹었을 때 그 양이 너무 적으면 그 영양분이 간으로 전달될 일이 없다고 해서 간에 기별도 안 간다라는 표현이 생겨나게 되었답니다. 이 표현에서는 간이 에너지를 만드는 기관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표현이라고 해석 하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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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잔치때 돌잡이는 왜 하는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이들의 돌잡이는 물건은 여러 가지를 둘 수 있으며 아이의 성별에 따라 두는 물건을 잡게 함으로써 아이의 미래를 점치는 동시에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입니다. 돌잡이는 아마도 중국에서 기원 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 정조실록> 에도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때 에도 행해 진 것으로 보아 보여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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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게임은 어디 시작되었는지 역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체스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 그리스, 중국 기원설 등등 여러 학설이 있으나, 고대 인도의 ‘차투랑가’ (‘차투랑기’로도 발음) 또는 ‘아슈타파’라는 게임에서 오늘날의 체스가 발생했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현재의 체스와 달리 차투랑가는 2개의 주사위를 던져 지정된 기물만 움직였다고 합니다. 체스판 생김새도 정사각형이 아닌 십자형이었으며, 4명이 하는 게임으로 마주보는 2명이 같은 편이 되는 팀 게임이었다고 하네여. 고대 인도에서 사랑 받던 차투랑가는 인도 북부지역을 정복한 페르시아로도 전파되어 큰 인기를 누리던 중 이슬람 율법이 강화되어 모든 도박, 특히 주사위 게임이 전면 금지된다고 하지요. 페르시아인들 가운데 누군 가가 주사위 없이 2명이 즐기는 새로운 게임을 차투랑가에서 변형시켜 고안해낸 게임이 ‘샤트랑’(Shatrangj)인데요. 이 게임이 서양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체스가 되었으며, 일부 역사 학자들은 이 시점에서 체스가 ‘발명’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페르시아인 가운데 정확히 누가 이 새로운 게임을 고안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에 얽힌 설화는 많다고 합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 ‘새로운 게임’을 발명한 사람에게 페르시아 왕이 상을 내리려 하자 그 사람은 여러 번 사양하고, 그러다 왕이 하도 고집을 피우자 다음과 같은 상을 요구한다고 하지요. 체스판 첫째 칸에는 조 한 톨, 다음 칸에는 그 두 배인 두 톨, 그 다음 칸은 다시 두 배인 네 톨, 등등 이렇게 체스판 64칸을 다 채워달라고 해서 생긴게 현대의 체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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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라는 뜻이 정확히 먼가요?예시 안중근 의사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사와 열사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정의 하자면 , ‘의사’는 ‘무력(武力)으로써 항거 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 ‘열사’는 ‘맨몸으로써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즉, ‘의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항거 하다 의롭게 죽은 사람으로, 성패에 상관없이 무력을 통해 적에게 대항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 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등이 대표적 예라고 볼 수있지요. 반면, 비폭력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삼일 운동 중에 돌아가신 류관순 열사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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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왜 티벳을 포기하지 않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이 포기 못하는 이유는 크게 3가지 입니다. 티벳을 중국의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듬해인 1950년 10월 티베트에 진공한 데는 군사적 이유가 컸다고 하지요.티베트는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인도, 러시아 등 강국들과 교차하는 지역에 있습니다.어느 나라든 이 지역을 지배하면 큰 이점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중국이 본토와 티베트 수도 라싸까지 철도를 연결한 것도 이웃 국가와 갈등이 일어날 때 군사를 신속히 이동 시키기 위해서 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중국이 겪고 있는 물 부족 문제입니다.여러 강의 발원지인 티베트는 현재 중국의 중요한 수자원 공급지 입니다. 이를 포기하면 경제적으로 많은 손실이 올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는 홍콩, 마카오, 대만 등 다른 특별 자치구에 대한 경고입니다. 현재 홍콩, 마마오는 중국 소유이지만, 대만은 아직도 독립된 국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티벳의 독립을 허용한다면 중국 정부로서는 다른 소수 민족 혹은 특별 자치구에 대한 지배력및 정치적으로 큰 손실이 될 수 있기에 군사력을 동원해서 티벳 독립을 철저하게 봉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정리하자면 중국은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티벳을 포기 못하고 있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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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천리장성은 어느시대에 왜 만든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631년(영류왕14년)에 축조를 시작한 성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요동 만주 벌판의 부여성에서 동 남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에 걸쳐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최근 연구 결과를 종합해보면 요하하구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성을 축조 하는 데는 무려 16년이 걸려 647년에 완공됐다고 하네요. 지금은 중국 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그 자취를 알아보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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