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는 왜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거절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제15대 왕인 광해군은 선조의 차남이였고 그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이것이 종법질서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조선에서 왕세자를 책봉한 뒤에 조선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인정받는 절차인 고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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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남산은 어떤 곳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앙 정보부와 안기부는 본관인 현재 유스호스텔과 5국인 현재 서울시청 별관과 그리고 6국인 현재 서울시 도시안전실등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인사들, 조작간첩의 대상자들, 권력 내부의 감시 대상자들을 불법 납치하여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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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싸인(서명)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서명( 싸인) 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결인데 수결(서명)은 자신이 한 것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문서의 내용에 대해 상대방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조선시대 왕들도 문서를 결재할 때 수결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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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는 조선의 자존심이었던걸루 알고있습니다.일본인들이 명성왕후를 시해한 이유를 알고싶습니다. 그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성 왕후는 친일 세력이 아닌 러시아나 다른 나라와 손 잡고 일본 세력을 배척 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명성 황후의 태도에 반감을 느낀 일본은 자객들을 데리고 명성 황후를 시해 하게 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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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관은 어디에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나라 최초 박물관인 제실 박물관은 창경궁 내 양화당에 개관한 뒤 1938년까지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후 덕수궁으로 옮겨가 이왕가 미술관, 덕수궁 미술관으로 바뀌었다가 1969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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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은 청룡의해 라고 하는데 그건 어떻게 정해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024년 청룡의 해 . 청룡이 의미하는 것은 권위와 힘, 풍요로움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갑진년. 갑진년은 육십갑자 중의 41번째 해라고 하느데 2024년 청룡의 해인 갑진년은 정확히 2024년 2월4일 오후 17시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때의 간지는 갑진년(甲辰年) 병인월(丙寅月) 무술일(戊戌日) 경신시(庚申時)경이 된다. 용인 진토(辰土)는 육십갑자 가운데 갑진(甲辰), 병진(丙辰), 무진(戊辰), 경진(庚辰), 임진(壬辰)이라는 간지를 만든다. 갑진은 청룡, 병진은 적룡, 무진은 황룡, 경진은 백룡, 임진은 흑룡으로 명명한다. 그 이유는 오행의 오방색은 갑을(甲乙)의 청색, 병정(丙丁)의 적색, 무기(戊己)의 황색, 경신(庚辛)의 백색, 임계(壬癸)의 흑색의 분류에 의해서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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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라는 명칭은 조선에서 스스로 정한것이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이라는 국명은 우리나라가 제어서 명나라의 허락을 받아서 사용 하게 된 것 입니다. 이렇게 국명을 허락 받는 것을 고명을 받는 다고 합니다. 명나라는 조선으로 공식 인정하는 고명을 받아 사용 하게 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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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제작에 대한 배에 대한 설계도가 남아 있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북선의 구체적인 모양과 구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는 상황으로 아직 확실하게 결론이 난 부분은 없는 상황인데 이는 거북선 자체가 한가지 고정된 구조와 형태로만 유지되지 않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개조되고 계속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당시 나대용이 만든 거북선의 제작도가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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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왜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가 강화도로 가지 않고 남한 산성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강화도로 가는 길이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서 막혀 버렸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인조는 남한 산성으로 피신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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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중 독일의 전략과 그 결과는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전략은 전격전 ( Blitzkrieg 블리츠크리크 전략 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전차, 기계화보병, 항공기, 공수부대 를 이용, 기동성을 최대한 추구한 전술 교리 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기동성 있는 선두집단에 전력을 순간적으로 집중시켜 적의 방어선을 뚫은 뒤 후방전력에 의해 이를 확고히 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기동성을 중시한 독일군의 전술은 기계화전에 대비되지 않았던 폴란드군과 프랑스군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무참히 박살낼 수 있게 해 주었으나, 단순한 종심방어 대신 기동화 된 예비 부대를 운용하면서, 돌파한 선두집단의 역량이 소모되는 시기에 맞춰 역습하는 경우 보급선 두절로 인해 전략 예비부대를 소모해버릴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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