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연개소문은 고구려 정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연개소문은 7세기 중반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여 고구려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원래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귀족 세력 중 하나로, 대대로라는 고위 관직에 오르면서 정치 중심부에 진입하였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귀족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어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당나라의 팽창과 외교 압력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당과의 유화 정책을 주장하는 온건파와 강경한 자주 노선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연개소문은 강경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연개소문은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642년에 정변을 일으켜, 당시 국왕이던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사실상 국왕 위에 군림하는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독재적 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집권은 고구려 정치에서 귀족 합의 중심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가 무너지면서 강력한 개인 권력 중심의 체제로 변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연개소문은 대외적으로는 당나라의 압박에 맞서 강경한 대결 노선을 택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고구려의 군사력과 국방을 강화하였습니다. 특히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군사 조직을 정비하여 당과의 전쟁에 대비하였습니다. 또한, 당나라의 외교 압력에 맞서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며 한반도 내 세력 균형을 재편하려는 시도도 하였습니다.연개소문 사후에는 그의 세 아들 간의 내분이 벌어지면서 고구려는 급격히 약화되었고, 결국 당·신라 연합군의 공격에 무너지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연개소문은 고구려 말기의 영웅적 인물이자 동시에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역사적으로 양면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Q. 고구려인의 식생활, 복식, 거주 형태는 어땠는가?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고구려인의 생활은 기후와 지형, 유목과 농경이 어우러진 생활 방식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식생활, 복식, 거주 형태는 이러한 생활방식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먼저 식생활 면에서 고구려인은 기본적으로 농경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일부 목축과 수렵도 병행하였습니다. 주요 곡물로는 기장, 조, 보리, 콩, 수수 등이 있었으며, 특히 기장과 조는 밥과 죽을 만드는 데 널리 쓰였습니다. 고기를 즐기는 풍습도 있었는데, 이는 사냥과 목축이 활발했던 북방 문화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특히 고기와 술, 젓갈류를 곁들이는 풍습이 있었으며, 음식을 손님에게 후하게 대접하는 문화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는 발효 음식에도 익숙하여 장류, 젓갈류 등 저장식품을 잘 활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복식에 있어서 고구려인은 활동성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복장을 착용하였습니다.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 형태의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띠를 둘렀으며,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짧은 옷을 착용하여 기동성이 높았습니다. 여성 또한 바지 위에 긴 저고리나 치마를 입는 형태로, 비교적 간결하고 활동적인 복장을 선호했습니다. 일반 서민과 귀족 간의 옷차림에는 차이가 있었으며, 귀족들은 비단이나 고운 옷감을 사용해 장식된 옷을 입었습니다. 또한 고구려인들은 화려한 관모나 머리 장식, 허리띠 등으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풍습도 갖고 있었습니다.거주 형태는 기후와 방어적 필요에 따라 다양한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일반적인 주거 형태는 움집과 반움집에서 점차 지상식 가옥으로 발전해갔으며, 겨울의 추위를 견디기 위한 온돌 구조가 발달하였습니다. 온돌은 방바닥 아래로 불기운을 전달해 실내를 따뜻하게 하는 고구려 고유의 난방 방식으로, 이후 우리 전통 주거문화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지배층이나 귀족층은 담장을 두른 크고 정교한 집을 지었으며, 집 안에는 여러 개의 방과 창고가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산간 지형이 많은 고구려 지역 특성상 주거지는 종종 산성 가까이에 위치하여 방어에 유리한 입지를 택하였습니다.
Q. 장건의 서역 개척은 어떤 배경과 성과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장건의 서역 개척은 한나라 무제 시기의 대외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한나라는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외교적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무제는 흉노와 적대관계에 있던 서쪽의 유목민족인 월지(月氏)와 동맹을 맺어 흉노를 견제하려는 전략을 세웠고,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장건을 사절로 파견하였습니다.기원전 138년, 장건은 월지를 찾아 서역으로 떠났지만, 초반에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 약 10여 년간 억류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탈출에 성공해 서역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월지를 방문했고, 비록 월지가 흉노와의 동맹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당초의 외교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서역 각국의 정치, 군사, 문화, 경제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흉노에게 붙잡혔지만 재탈출에 성공해 기원전 126년경 한나라로 귀환하였습니다.장건의 이 여행은 한나라에 큰 의미를 남겼습니다. 그의 보고를 통해 한나라는 서역 세계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얻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역과의 교류가 본격화되었습니다. 특히 장건의 여정은 후에 동서 교역로인 비단길의 개척으로 이어졌으며, 중국의 비단과 서역의 물자들이 활발히 교환되기 시작했습니다.이와 함께 서역 국가들과의 외교가 확대되고, 한나라의 영향력은 중앙아시아로까지 퍼졌습니다. 나아가 장건 이후 서역에서 유입된 불교, 포도·석류 같은 작물, 외래 동물과 문화는 중국 사회에 새로운 변화와 자극을 주었습니다.
Q. 한나라에서 유교가 국교로 채택된 과정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 한나라 초기 한고조의 통치 시기에는 법가와 도가 사상이 혼용되었고, 실용적인 통치가 중심이었습니다. 한고조는 진나라의 엄격한 법가 정치에 반발하여 법치를 다소 완화하였지만, 동시에 유교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유가를 크게 중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기의 한나라는 사상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법가, 도가, 음양가 등이 혼재하는 상태였습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나라는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이 필요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무제 시기부터 유교가 점차 중용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무제는 유학자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동중서는 『춘추』를 바탕으로 유교 사상에 천명(天命)과 정치윤리를 결합시켜, 유교를 하늘의 뜻을 대변하는 사상으로 승격시키고 이를 황제 통치의 정당성 근거로 삼도록 주장하였습니다.무제는 이에 따라 유교를 국가의 공식 이념으로 채택하고, 유학을 교육과 관료 임용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태학을 설치하고, 경서를 중심으로 한 학문 체계를 정립하였으며, 관료를 선발하는 추천제에서도 유교 경전에 대한 소양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유교는 한나라의 정치, 교육, 사회 전반에 걸쳐 중심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사실상 국교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이러한 유교의 국교화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유교의 충(忠), 효(孝), 예(禮) 사상이 유용하게 작용하였습니다. 둘째, 통치 질서의 정당성을 하늘의 뜻(天)과 연결함으로써 제왕의 권위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교육과 관료 등용에 있어서 유교 경전 중심의 학문이 정착되며, 유학이 엘리트 계층의 기본 소양으로 자리잡았습니다.
Q. 고대로마시대 유리공예기술 수준과 어떤 특징을 갖고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고대 로마 시대의 유리공예는 인류 유리공예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며, 기술적·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특히 기원전 1세기경 시리아 지역에서 시작된 ‘유리 불기 기술(Glassblowing)’이 로마에 전파되면서 유리공예는 혁신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이 기술을 통해 유리는 이전보다 훨씬 가볍고 얇게 제작될 수 있었고, 대량생산도 가능해져 일반 시민들까지 유리 제품을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로마에서는 유리를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주로 음료를 담는 병이나 컵, 향수를 보관하는 병, 의약품 용기, 조명용 램프 등 실용적인 물건들이 제작되었고, 이러한 유리 제품은 로마 제국 전역은 물론 지중해 주변과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지로도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이처럼 유리는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라 실용성과 접근성을 모두 갖춘 생활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기술적으로도 로마 시대에는 투명한 유리 제작이 가능해졌고, 다양한 색상과 장식이 시도되었습니다. 유리에 색을 입히거나 표면을 새기는 기법, 금박을 입히는 기술, 모자이크 형태로 색유리를 조합하는 장식 방식 등 예술성이 뛰어난 기법들이 발달하였으며, 때로는 로마 신화나 인물의 얼굴이 장식된 유리 제품도 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유리공예는 실용성과 함께 미적인 가치를 지닌 예술작품으로도 인정받았습니다.또한 로마의 유리공예는 도시 곳곳에 유리공방이 생길 정도로 산업화되었으며, 유리 제품은 제국의 중요한 무역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로마의 문화와 기술이 널리 퍼지는 데에도 유리공예는 일정한 역할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