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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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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5일 작성 됨
Q.
신라시대에 호족들은 왜 선종을 믿었나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신라 말기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고 각지에 호족들이 발호하였습니다.이들은 자신의 사상적 기반으로 선종을 선호하였습니다. 선종은 불립문자라고 하여 경전에 의하지 않고 자기 내에 존재하는 불성을 중요시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이런 개인적 믿음과 불성을 중요시하는 선종을 믿었으며 호족들은 이들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더욱 선종을 부흥시키려 했습니다.
2024년 8월 15일 작성 됨
Q.
조선사료에서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복귀후 난폭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는게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소현세자는 청에 볼모로 잡혀갔으나 그곳에서 많은 학자들과 교류를 하고 지배층과도 두터운 교류를 하고 지냈습니다.그런 소현세자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부왕인 인조는 아들을 냉대하였습니다. 자신은 청나라에게 패배해 삼배구고두라는 치욕까지 당했는데 그런 청나라 지배층과 잘 지내는 것이 보기 싫었던 것이지요.심지어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선물로 가져온 벼루를 인조가 내던져서 소현세자 머리에 맞아서 그로 인해 죽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본래부터 체력이 약했던 소현세자는 귀국을 하고 나서부터 이런 이유로 마음병을 얻어 병치례가 잦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귀국한지 2개월만에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2024년 8월 15일 작성 됨
Q.
공민왕이 어떤 주요공신들을 숙청해왔나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공민왕이 숙청한 대신들은 당시 고려보다는 원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고려를 좀 먹어가던 기철 같은 신하들이었습니다. 공민왕은 강력한 반원정책을 펼쳐서 고려조정내에 원의 풍습이나 의상도 다시 고려식으로 바꾸었고 정동행성도 폐지하여 자주권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2024년 8월 15일 작성 됨
Q.
조선의 신진사대부들은 공민왕의 성생활과 사생활을 중점으로 평가절하했던걸까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공민왕은 반원정책을 펼치고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한 군주입니다.이 당시 신돈이라는 중을 크게 등용하여 여러 개혁등을 수행하였습니다.하지만 그와중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고나서 실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신돈은 반야라는 여인을 소개하였고 공민왕은 반야가 노국공주와 매우 닮아 총애하였고 이들 사이에서는 아들이 태어나는데 후에 우왕이 됩니다.조선의 신진사대부들은 이 우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 하면서 정통성을 부정하였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내세웠습니다.
2024년 8월 15일 작성 됨
Q.
1945년에 있었던 포츠담회담이란 무엇이고 우리나라에 어떤 의의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당시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고 연합국 정상들은 포츠담에서 3번째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 회담에서 선언을 발표하게 되는데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고, 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일처리방침을 밝혔습니다. 한국문제와 관련해서는 제8항에서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전후 독립을 재확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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