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성계는 고려 시절 수많은 가병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건국 당시 지방 호족 세력들의 힘을 빌어 활용키 위해 태조의 정비(正妃) 6명과 기타 부인 23명 등 29명은 모두 태조가 지방의 호족, 공신·귀화 귀족 등과 유대를 맺기 위한 혼인 정책에 따라 취한 그들의 딸들로 이 가운데 경주의 평준, 합주의 이원, 춘주의 왕유, 서경의 김행파, 신주의 강기주 등 유력한 호족들이 그들의 딸을 태조에게 바쳐 세력보전을 꾀하였습니다. 태조는 또한 지방 호족을 회유하여 그들에게 중앙관직의 위계와 똑같은 명칭의 향직위를 주고, 중앙 정부를 축소한 듯한 조직을 갖게 하여 지방 자치를 맡게 하는 한편, 기인이라 하여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삼아 그 세력을 견제하였습니다. 여기서 지역 호족 세력에 지방자치를 맡겼으니 공권력 수행 및 치안, 경호를 위해 사노, 사병 등이 발달되었고, 무신정권 시대에 들어 시작되어 고려말기까지 경대승, 최충헌의 도방, 최우의 서방, 최씨가문의 마별초, 이성계의 가별초 등 이름있는 가문들은 가병들을 공식적으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중앙집권 성향이 적었고, 지방분권 성향이 컸던 탓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국경의 여진 등의 공격을 방어하며 관리해야 했기에 더 강하고 많은 가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Q. 과거 고려시대에 정말 요동성을 점령한 적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 요동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다가 연나라의 공격으로 잃게 되었다가 한나라 때 고구려 미천왕이 그 지역 한사군을 몰아내고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점령하고 고구려 영토로 수복된 후 요양 지역에 요동성을 쌓았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이 지배하다가 대진국 발해가 건국되며 다시 찾아와 200년간 영토였다가 발해가 멸망하며 요, 금, 원나라에 속했었습니다.그러다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는 요동도지휘사사를 두어 요동을 포함한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가지 트러블이 생겼고 고려는 공민왕 5년에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이후 관서 지방과 관북 지방 북쪽으로 영토를 넓혔습니다.공민왕 18년 고려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는데 동북면 원수 이성계는 1370년 음력 1월 압록강과 파저강을 건너 이오로티무르가 지키는 우라산성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서북면 원수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을 공격하여 요동성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합니다.
Q. 한민족이 압록강 이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것은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국가 시절에는 대부분 삼한의 한민족이 그 일대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전쟁으로 인해 쟁탈전은 있었어도 실질적으로 고구려 멸망 후 당에서 안동도호부를 세워 자신들이 한반도를 관리하려는 야욕을 부리던 시기를 제외하면, 항상 우리 한민족의 국토였습니다. 최종적으로 대진국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요, 원, 명, 청으로 지나오면서 요동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소실한 것으로 판단되고, 간도 즉, 만주 지역의 경우 청과 분쟁은 있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의 영토로서 관리되었다고 여러 사료에서 확인되어집니다. 1712년 숙종 38년에 백두산정계비를 조선에서 세우면서, 비문에 서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조선에서는 송화강 상류가 토문강이므로 간도까지 조선의 영토로 확정하고 관리까지 파견하여 다스립니다. 청나라는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조선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일본이 을사조약을 근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하고 청과 간도 지역에 대해 교섭을 벌여오다가 남만주철도부설권과 푸순 탄광채굴권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를 청에 넘겨주는 협약을 1909년 9월에 일본 마음대로 체결하였습니다. 이 이후부터 우리 한민족은 이 일대의 영향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도 우리는 그 지역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돌려받아야 하는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Q. 나당 전쟁 시작의 이유와 전개 그리고 결과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 김춘추와 당 태종이 만나 나당 동맹을 결성할 때 고구려와 백제 멸망 후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쪽은 당이 차지하고 남쪽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지고 나니 당은 고구려의 옛 영토에는 안동도호부를, 백제의 옛 영토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적으로 한반도를 다스리려는 욕심을 드러냈습니다. 늘 자신들을 짓누르던 패배의식과 불안감의 원인인 한반도가 완전한 자기네 땅이어야 안심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원래도 당의 목적은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나면 상대적으로 약한 신라를 나중에 다 집어삼켜서 한반도 전체를 당의 손아귀에 넣는 것을 목표로 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하지만 신라는 철저한 전쟁 준비와 고구려부흥세력을 포섭하는 등 하여 웅진도독부를 쳐내고 백제의 옛 땅을 회복하였습니다. 신라도 당과 손절할 시기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은 한반도에 대한 야욕이 있었으나, 토번국도 견제해야 해서 계속해서 나당전쟁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집어삼키겠다는 야욕은 버리지 못해 패퇴하여 요동으로 옮긴 웅진도독부 건안성에 백제유민을 옮기고,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대방군왕에 봉하여 이른바 소백제국의 세우고 한반도의 신라를 견제하고, 고구려유민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멸망한 고구려의 옛 땅과 그보다 더 넒은 영토를 차지한 대진국 발해의 등장으로 당은 더이상의 한반도에 대한 욕심을 부릴 수 없게 됩니다.지금도 그렇지만, 한반도는 산지형으로 되어있어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이고, 삼면이 바다로 되어있어 무역과 교역에 탁월한 입지이며, 비옥한 토지로 곡창지대가 많아 식량조달에 좋은 전초기지가 될 수 있으니 당에서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하였지 않나 추측해봅니다.
Q. 상의 티샤츠 가로, 세로 줄무니 옷 입는 사람 성향이 다른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시각적으로는 가로 줄무늬가 세로 줄무늬보다 뚱뚱해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로 줄무늬의 평행성의 간격이 넓거나 두꺼운 경우에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줄무늬가 가늘고 그 간격 또한 좁다고 한다면 자신의 체형을 고려하여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서 가로 줄무늬 옷을 추천하고, 크게 보이기 위해서 세로 줄무늬 옷을 선택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일종의 착시 효과를 이용해서 이럴 때는 가로 줄무늬가 더 날씬해보이게 하는 착시를 가져옵니다. 심리적으로는 세로 줄무늬는 직선적, 상승에의 욕구, 공격적, 가로 줄무늬는 안정적, 평등, 자유로움 등을 표출한다고 하기도 하나 그냥 가로와 세로의 줄무늬를 선호하는 것은 기호의 차이로 보입니다. 한때 예술가적 표현으로 일탈, 자유로움의 상징이 줄무늬였는데(이것은 가로 줄무늬) 그것은 과거 마린룩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선원들은 대부분 가로 줄무늬의 옷을 입었는데 이것은 어떤 성향의 차이가 아니라 신분의 차이로 배에서 가장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 이러한 복장을 하였습니다. 이후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의 이미지로 드넓은 바다를 헤쳐나가는 것에서 자유로움, 일상에서의 탈출 등 일탈의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예술가들에게는 그러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피카소도 가로 줄무늬 티셔츠를 즐겨입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저는 가로 줄무늬, 세로 줄무늬 다 입는데 어떤 것을 특별히 선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Q. 성경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기독교에서는 이를 어떻게 설명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성경에서는 남녀의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유대교에서 파생되어 발전해왔으니 뿌리가 같습니다. 지금은 유대교, 기독교(개신교, 카톨릭)로 나뉘어져 있지만 랍비, 목사, 신부 모두 남성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부속적인 사상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Q. 유교사상은 어떻게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전파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명의 성리학이 고려 시대에 신진사대부들에게 전파되어 그 학문적 사상의 기반이 되었고, 고려 말 혼돈의 시대에 신진사대부 중 정도전 외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북방 세력인 이성계의 세력과 함께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정도전이 설계하여 성리학의 기반 위에 국가를 새로이 세우고,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학자들이 국정에 대해 논하며 만들어가기를 바랐습니다. 이에 조선은 초기부터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그동안의 폐해를 들어 억제하고 성리학이 기반이 된 유교사상을 도입하여 숭유억불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에 관혼상제 모두를 유교사상을 접목하여 하게끔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되었기에 발전하였고, 조선 중후기에 들어 너무 학문적 유토피아만 꿈꾸는 것이 아닌가 하여 몇몇 학자들 사이에 실제 생활과 밀접한 학문이 필요하다 하여 소위 실사구시, 실학 사상이 대두되기는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유교사상은 퇴화되지 않았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중국보다 더 우리 실정에 맞는 유교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니 언젠가는 그 색이 바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