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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공유하고 모르는 것을 함께 공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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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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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제사는 유교문화이고49제는 불교문화라는데 맞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의 제사 문화는 원시·고대인들이 자연 그 자체를 대상으로 외경심, 신비감의 근원인 신, 하늘, 땅 등에 대해 삶의 안식과 안락을 기원하거나 감사의 표현으로 제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인간의 사후 영혼에 대한 신앙도 생겨나게 되어 조상신에 대해서도 숭배와 복을 비는 제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가 발달하면서 제의는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 제도로 정착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경우도 단군 이전부터 하늘의 자손으로서 제천의식을 하였고, 나아가서는 단군을 섬기는 제사나 자연의 일부(토템-산, 바다, 나무 등)를 섬기는 제사를 지내곤 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지내고 있는 조상 제사의 형태는 조선 시대에 들어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제도화가 크게 진전되었고, 국가, 왕가, 일반사가의 모두 주희의 『가례』를 기본으로 삼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유교의 제사는 효의 한 방법으로서 조상의 추모와 복을 바라는 것이 섞여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하는 재는 유교의 제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한자 표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부터 신께 올리는 것이나 유교적 전통 방식으로 조상에게 올리는 것은 제(祭)라고 하고, 불교에서 하는 것은 재(齋)라고 합니다. 원래 재는 부처가 하루 한번 하는 사시공양을 가리키던 말로 이후에 법문을 설법하였기에 법회로 발전하였고, 이후 불교 의식인 재로 불리었습니다 불교의 재는 조상신을 기리는 제사가 아니라 그 영혼이 이승의 연을 뒤로 하고 사후 세계로 돌아가 다시금 윤회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의식을 치르는 것입니다. 에는 귀신에게 제사 지내지 말라는 부처의 말씀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새로운 세계에 바로 태어나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것을 '중유'라 하며 사람이 죽으면 7일 단위로 머무르고 7일 한도로 인연을 못 얻으면 죽었다가 다시 나서 7일을 머문다고 합니다. 이로써 총 49일을 머무르는 것을 중유라고 합니다. 이 기간에 인연을 받아야 중유 종자가 바뀌어서 소속되어 있는 원래의 곳에 다시 태어나거나 또 다른 종류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망자는 필히 윤회를 하는데 현생에서 업보에 따라 지옥세계, 아귀세계, 축생세계, 아수라세계, 인간세계, 하늘세계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 망자는 현생에서 행한 행위에 대해 7명의 재판관에게 재판을 받고, 그 결과에 따라 어느 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이른바 삼악도(三惡道; 지옥도·아귀도·축생도)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재판관들에게 드리는 기도행위가 바로 49재입니다.저승의 각 재판관들은 진광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성대왕의 순서로 7일씩 망자를 재판합니다. 유가족들은 이러한 49일 동안 7번의 제사를 지냅니다. 보통 7일 마다 올리는 재는 간소하게 하고 마지막 49일이 되는 일곱 번째 재는 정성이 가득 담긴 재물을 드립니다. 49재순서는 1.시련(侍輦:영가를 초청해 영단에 모심) 2.대령(對靈:영가에게 진행할 일을 부처님의 법으로 한다는 것을 설명함) 3.관욕(觀浴:업장소멸과 부처님의 정법이 무엇인지설명하는 일종의 영가 목욕시키는 것) 4.헌공(獻供:부처님게 공양을 드리는 의식) 5.신중헌공(神衆獻供:천지신명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 6.천도재 (이 천도재를 제사와 유사한 의미로 여기기도 함)7.봉송(奉送:영가를 환송) 8.탈상(脫喪:상주가 평상으로 돌아가는 의식)으로 종료된다고 합니다. 정리해보면 49제라는 말은 없고, 49재라고 합니다. 유교의 제례 문화와 불교의 49재 장례의식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유교의 제례 문화에서는 위패에 지방을 쓰는데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부친의 제사를 올릴 때 쓰는데 이때 쓰는 '신위'라는 것은 돌아가신 부친의 영혼을 부르는 말입니다. 따라서 유교의 제사는 조상신을 불러서 하는 것이고, 불교의 재, 즉 49재는 장례의식으로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서 윤회할 수 있도록 하는 기도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요즘 절에서는 불교 신도 중 집에서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절에 위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오랜 유교적 사상으로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효라는 의식이 강하다 보니 불교도인 경우에도 그 날을 기리기 위해 절에 위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조상의 제사를 대신 지내주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기일에 불교적 재를 올리는 것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천주교에서 부모님 기일에 미사를 넣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교의 제사와 불교의 49재는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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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왕의 딸로 태어나면 붙여주는 칭호가 공주 옹주 이렇게있는데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실부인 즉 중전에게서 낳은 아들은 대군, 딸은 공주라 부르고,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은 군, 딸은 옹주라고 부릅니다.부름에 있어서 차이는 있었으나, 후계로 낙점된 세자가 아니고서는 대우는 동일하다고 보면 됩니다. 공주와 옹주는 권력 서열과는 상관없고 구분 없이 부마라고 지칭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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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홍범도 장군이 잘못한 부분도 있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시는 바와 같이 홍범도 장군은 일제 식민시대에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운 독립운동가입니다.최근 흉상 이전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육사에서 이전해여 독립기념관으로 옮기는 것을 검토 중이라는 것으로 보아 독립유공자임에는 이견이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가 1927년 소련 볼셰비키 공산당원이었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국가관 확립을 교육 목표로 하는 육군사관학교에 흉상이 있다는 것에 문제 제기가 되어왔던 것 같습니다.당시에는 일제 치하에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국민들 중 지식인들이 조국의 독립 운동을 위해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활용하였기에 해방 이전에 그러한 사상을 가진 독립유공자들은 적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방 이후 6.25 전쟁 전까지 공산주의자였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6.25 전쟁에 공산주의 쪽 편에 서서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을 침략하는데 일조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그러한 활동을 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문제가 되는 것이겠죠.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사망하였기에 거기에 관계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다만 홍범도 장군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측은 자유시 참변에 그가 관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자유시 참변이란 1921년 만주 일대를 근거지로 하던 독립군부대가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을 규합하고 연해주로 이동하게 됩니다. 전체 규모는 2천여명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소련 공산당이 무기 등을 지원한다고 의심한 일본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러시아에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 같은 해 6월에 러시아는 독립군에 무장해제를 명령하자 독립군은 저항하자 사살 또는 포로도 체포하는 참변이 일어나게 됩니다.그런데 소련이 일본의 관계만이 아니라 이 내면에 독립군 내부의 분열 및 이해 관계가 얽혀있었다는 문제가 붉어져 나오게 됩니다. 독립군 부대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지휘권에 대한 싸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극동공확국 인민혁명군은 소련 내전 때 소련 측에서 만들었던 조직입니다. 독립군 부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여 사라졌고, 남아있는 포로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그에 따른 처벌을 받게 됩니다.홍범도 장군이 그 자유시 참변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였다는 증거는 없으나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가 몰살하다시피한 독립군 부대 쪽이 아닌 혁명군 편에 섰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고 보는 쪽도 있습니다.그 이유는 그가 자유시 참변 후1. 포로들의 재판에 군사재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는 점2. 연해주에 거주하면서 레닌으로 부터 혁명정권 협조에 감사하다며, 금전적 지원과 권총을 하사 받은 점3. 그 이후 1927년에 볼세비키 당에 입당하여 소련군 대위로 편입되고, 조선인여단 지휘관으로 승진하고, 휘하의 독립군 병력 300여명을 소련군으로 편입시킨 점4. 자유시 참변 생존자인 사할린부대 출신의 김창수, 김오남이 자유시 참변의 책임을 물어 홍범도 장군을 죽이려고 했을 때 레닌에게 받은 총으로 그들을 사살했는데, 이후 감옥에 갇힌 후 레닌의 증명서로 석방된 점등 여러 이유로 인해 혜택을 받았으니 자유시 참변에 독립군 부대를 공격하여 사살하는데 일조했다는 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하지만 그러한 근거는 없다고 보이고 비난하는 측에서 정황상 추측하는 것이라 보이며, 6.25전쟁 훨씬 전에 사망하였기에 독립운동 외에 현 대한민국에 위해를 가한 행적은 없다고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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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발해의 건국과정과 멸망이유는 무엇인지 질문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해의 정식 명칭은 대진국입니다. 당시 중원의 당나라가 자신들이 황제국가로 제후국인 것처럼 인정하여 대중상은 진국공, 걸사비우를 허국공이라 봉한다는 칙서를 내렸고, 걸사비우가 이를 거부하였고, 당과 대치하다가 사망하였고, 대중상도 얼마 후 사망하고, 대조영이 황위에 오르자 당에서는그것을 또 격하하여 발해군왕에 봉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사서를 기준으로 발해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그 전에는 일본 등 주변국에서는 여전히 고려라고 불리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진국 발해는 황제국으로 전승한 고구려 이상으로 맹위를 떨친 강국으로 해동성국이라 불리었습니다. 대진국 발해는 고구려계와 말갈계를 대표적으로 하여 다민족 국가로서 고구려계였던 대중상, 대조영, 말갈계의 걸사비우를 주축으로 하여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서 딱 30년 후인 698년에 건국되었고, 926년에 거란의 침공과 내분으로 인해 멸망하였다고 합니다. 멸망의 시점은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발해 멸망 후 바로 그 유민들이 후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판단되어집니다. 그 이유는 책부원귀, 오대회요, 구오대사, 오대사기, 속자치통감 등의 중국 사서에 발해 멸망 3년 뒤인 929년 5월 발해에서 고정사라는 사신을 파견하는 기록도 나오고, 929년 7월 19일 그 고정사를 태자 세마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에 934년 발해 태자 대광현이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귀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후 기록에는 발해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고, 같은 대씨 성의 왕과 태자에 대한 기록에서 정안국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발해라는 국호가 정안국으로 내부적인 이유에 의해 바뀌지 않았나 판단됩니다. 200년 이상 지속된 강국이었습니다. 991년 기록에서도 왕자인 대원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도 왕권을 발해 왕족인 대씨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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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려시대,조선시대 사람들은 양치를 어떻게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치질의 어원을 살펴보면 '양치養齒'는 버드나무 가지를 뜻하는 '양지楊枝'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해 이를 세정하는 행위를 양치질이라고 했습니다.고려시대의 에서는 치아 사이를 청소하는 방법으로 버드나무 가지 끝을 으깨어 그 갈라진 것으로 이와 이 사이를 쓸어내듯 하면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에 소금으로 이를 닦고 따뜻한 물로 헹구어내면 이에 남은 술독이 제거된다는 이야기가 있고, 굵은 소금을 입에 넣고 손가락을 이용하여 닦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금을 이용하는 방법은 당시 소금이 비쌌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활용하기가 어려워 쑥이나 지푸라기를 이용했다고 하고, 쑥을 달인 물로 입안을 헹구어내던가, 지푸라기로 이에 묻은 지꺼기 등을 닦아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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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백의민족'의 유래에 대해서 질문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민족이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 불리었던 것은 주변국의 과거 사서에도 나타나있습니다. 에 “부여는 흰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널리 입었다, 푸른 들에서 업드려 일하는 사람들의 옷이 모두 희다." 라고 우리 민족의 복색을 기술해놓았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의 경우 대부분은 일반인들은 흰색 옷을 입었고, 고위 관리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중국에서 들여온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색의 옷을 입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외국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 사신 동월이 다녀가 이르기를, "조선사람들은 모두 흰 옷을 입는다." 라고 에 나와있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소의 도굴을 시도한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쓴 책 에서 “조선 남자나 여자의 옷 빛깔은 모두 희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흰 옷을 즐겨입었던 이유는1. 염색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2. 유교적 관념에 따라 신분을 구분하기 위해 (높은 신분은 화려하게, 평민 이하는 흰색으로, 하지만 이것은 조선시대의 이야기지 삼국시대 때도 흰옷을 주로 입었으므로 아니라고 판단됨)3. 천손으로서 빛을 상징하는 흰 색을 제례, 상례 등에 입다가 그것이 일상까지 전파되어서등 다양한 설들이 제기되었었습니다. 하지만 신분구분을 위해 일부러 복색을 달리하거나 염색기술이 발달하지 못해서라는 말은 그렇게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관리의 복색의 경우 그 고하를 구분하기 위해 차등을 두었고, 그것은 중국과 한국, 일본도 비슷한 사례를 보입니다. 아마도 중국의 관직제도에 대한 도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일반 백성들의 경우 대부분 자연유래로 만들어진 섬유를 이용하여 옷을 만들어 입었고, 당시 염색을 하는 기술과 염색된 옷감도 있으나 그것은 고가였기에 귀족 등 경제력이 있지 않으면 구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화려하게 복색을 갖추는 것보다는 정서상 흰색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던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우리는 사실 이러한 것에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일제 식민 치하에 항일 투쟁 함에 있어서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흰색의 전통적인 이미지인 지조, 청결 등 고결함이 강조되어 항일운동에서 흰옷을 입는 것을 저항의 철학으로 인식되었다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학자들도 관직에 있지 않고 제야에서 후생들을 가르치고 할 때의 복색은 흰색이 주를 이루었다고 확인됩니다. 위의 자료들과 같이 일상에 양반이든, 평민 이하이든 일상생활에서는 흰색옷을 많이 입고 있는 모습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왜'라는 이유가 확실하게 기재되어있지 않으니 여러가지로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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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의 왕족들은 어떻게 지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부분의 직계 왕족들은 조선에 남지 못하고 일본으로 볼모 형태로 끌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조선땅에 왕족이 남아있는 것에 대해서 달가워 하지 않았고, 왕족들간의 갈등도 부추기며 회유하여 일본제국에 충성하도록 합니다. 황태자였던 영친왕은 일본 국적을 받아들였으며, 해방 후에도 국민들의 정서가 거부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박정희대통령 때 정부의 배려로 귀국하고 한국 국적을 회복하였습니다. 의친왕의 장남이었던 이건은 죽을 때까지 일본인으로 살다가 갔으며, 친일적 인사로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키고, 조선 망신은 이건 공이 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해방 이후 모모야마 겐이치라는 일본인으로 귀화하는 치욕적인 행태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인 이우는 일본 히로시마 원폭 때 사망합니다. 조선 황실에 있을 때 만큼은 아니었지만, 직계 왕족들은 일본에서 그래도 기본적인 대우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물론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고, 항상 감시와 조롱을 받으며 살았지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일본인으로 귀화하는 행위 등으로 볼 때 경악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왕족의 태도는 아니었지요. 행방 이후까지 살아있었던 왕족들은 그렇고 일본에서 풍요롭게 살지는 못했고, 말년에 빈곤층으로 살아갔다고 합니다. 그나마 의친왕과 이우 공의 경우에는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살았으나 정서상으로는 반일의식을 가지고 살았고, 물밑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일국의 왕족으로 나라 잃은 국민들을 배신했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며, 평생을 죄책감에 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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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의 군사들은 사병개념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곽재우는 성리학자였고,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 정규군이 아닌 의병장으로 붉은 옷을 입었다 하여 홍의장군이라 불리었습니다. 게릴라, 유격전을 주로 하였으며, 심리전, 기만전술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청년기에 무예에 몰두하였는데 이유는 지방 사족의 자제들은 중앙에 진출하기 위해 대과에 급제해야 하나 사실상 한양 내 집안 자제들과 경쟁하기에 부담이 커 경쟁이 낮은 무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러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34세에 정시에 지원하여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였었으나 이후 감수에서 몇 개의 답안이 문제가 되어 파방, 즉 최종 불합격 처리되었습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고, 거병하여 의병장이 되었습니다. 왜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면전으로 보기 어렵고, 실제 사료에도 왜구의 수송선, 소부대를 기습하는 방식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임진년 5월초부터 전승에 대해 알려졌는데 부장 4명과 낙동강에서 왜선 4척을 물리쳤다는 기록, 13명과 함께 같은 곳에서 올라오는 11척의 왜선을 몰아냈다는 기록 등으로 볼 때 소규모였던 것으로 확인되며, 이후 의병의 규모가 커지면서 2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곽재우는 자신의 경상남도 의령 쪽에 의병훈련지를 정하고 의병을 모은다 널리 알렸으며, 사람들이 모였고, 처음에는 수십에서 시작하여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정규군은 아니었고, 지역에서 무예를 수련하거나 힘 좀 쓰는 장사들과 뜻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던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솔선수범하여 나서는 리더들과 그와 함께 하는 이름 모를 영웅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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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남녀평등이 조선시대에 불평등해진 계기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역사에서 고대국가 때부터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완전한 남녀평등이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특히 국가 운영 등의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여성의 진출은 고대국가에서도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여의 태후, 고구려의 유화부인과 소서노 등이 일부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하였지만, 그 이외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구려 때에는 군에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부대도 있었다고 하니 가장 진보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라에는 선덕, 진덕여왕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라의 특이한 골품제의 탓에 왕이 될 수 있는 골품에 남자가 없어서 선덕, 진성여왕이 되었던 것이지 같은 골품에 남자가 있었으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여성의 활동성이 보장되었었지만, 삼국시대에도 완전한 남녀평등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천제를 지낼 때 여성을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일상생활에서는 고려시대 이전 여성들의 활동이 더욱 왕성했다는 것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재산소유, 재산상속을 할 수 있었고, 길쌈이라는 시장제도를 통해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남녀의 만남과 결혼, 재혼도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성리학적 기반으로 유교사상이 기존의 불교사상을 멀리하는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면서 유교적 가치 중 부부유별 같은 근본적으로 역할의 구분을 가져오면서 남녀의 차별이 심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역할의 구분으로 시작하였지만, 점점더 국정운영, 국방, 경제활동 등 주요 활동을 남성이 역할을 하고, 여성에게 집안, 가문의 운영에 대한 역할로 고착화되어 여성의 역량을 한게화하는 지경에 이르러 더 극심한 남녀차별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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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구려는 왜 연개소문 사후 급격히 무너진걸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는 엄밀하게 말하면 부족국가입니다. 중앙집권적 체계가 있었지만, 각 가문을 지역의 책임으로 두고 운영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5개의 연맹체였는데 계루부, 소노부, 관노부, 절노부, 순노부의 5부족이었고, 그 부족의 장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제도를 제가회의라고 했습니다. 원래 왕을 선정할 때 소노부에서 선출식으로 배출하였었으나 태조때부터는 계루부 고씨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고정되었습니다. 그러다가 5부족제를 고국천왕 때 없애고, 5부제를 실시함으로써 왕이 있는 지역을 중부(계루부)를 중심으로 동(순노부), 서(절노부), 남(관노부), 북(소노부)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왕위를 하나의 가문에서만 이어가는 중앙집권적 모양세를 갖추었지만, 5부제로 각 지역은 권력을 가진 가문이 책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칭이 방위로 바뀐 것은 중앙집권적 흔적이라고는 하나 고구려 말기에도 각 가문의 세력은 왕권을 위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가문이 연개소문이 속한 동부가문입니다. 연개소문은 동부대인 연태조의 자제로 연태조는 신선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의 대단히 명망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이에 높은 벼슬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연개소문이 조의(무사집단) 출신이었기에 원래는 고구려의 수련집단(종교적 색채)이었으나 연개소문이 권력의 최상층에 오르고 난 후에 공식적으로 조의라는 이름을 감추고 선인은 최하위관등제에 위치하였으나, 조의는 동부가문의 사병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힘을 가진 연개소문은 군부의 강경세력과 함께 중원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강했고, 온건파들이 당에 고개를 숙이고 평화만을 부르짓는 것과 극렬하게 대치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온건파였던 영류왕도 장년, 원로대신들과 짜고 연개소문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천리장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라는 것을 빌미로 연개소문을 변방으로 보내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략을 눈치 챈 연개소문이 역으로 연관된 관료들을 모두 죽이고, 평양성으로 군사를 밀고 들어가 영류왕도 죽이게 되고, 새로이 보장왕을 옹립하게 됩니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막리지에 오르게 되고 그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군은 당시 최강이었던 당과의 1, 2차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도 나이가 들게 되었고 666년 사망하게 되었고, 그가 걱정하던 자신의 세 아들들의 반목에 의해 장자인 연남생이 당에 귀화하게 되고 역으로 그를 앞세워 신라와 함께 공격해왔고, 고구려 지도층의 내분이 격화되어 결국 그가 사망한 지 2년 뒤인 668년에 고구려는 안에서 먼저 허물어지고 속이 텅 비어버려 당과 신라의 공격에 무너지게 됩니다. 연개소문은 왕의 시해한 역적이라는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대막리지인 군통수권자로서, 그리고 장군으로서의 지휘력, 전투력으로 볼 때 적군에게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두려움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살아생전 백제도, 신라도, 당도 고구려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했던 장수들도 연개소문만큼이나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그의 부하였던 검모잠이 보장왕의 아들 안승을 내세워 고구려부흥운동을 벌였으나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망명했습니다. 다만 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중심으로 동모산에서 건국하고 진국이라 명하였고,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여 고려라고도 불리었다고 합니다 이후 당에서 대중상을 진국공으로 봉하였다고 중국측 사료에 있으나, 그것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받는 속국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진정한 국가체제를 갖추고 대조영이 태조가 된 이후로는 당에서 발해군왕이라고 책봉하면서 발해라고 불리었으나 대조영이 그 책봉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당이 그 지역을 자신들의 권역이라고 넣고 싶어 대조영과 진국을 인정하면서 마음대로 책봉서를 보냈다는 것이 합당한 듯 합니다. 일본과의 국서에도 3대 문왕까지도 '고려의 왕 태흠무가 말한다'라고 썼고, 일본에서 파견한 사신도 고려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후 국제적으로도 첫 국호는 고(구)려, 이후 해동성국 또는 대진국라고 혼용했던 것으로 보이고 당이 세력을 크게 가지고 있었으니 외교적으로 관계한 나라에서는 발해로 알려졌을 것이라 봅니다. 어쩌면 무너진 고구려가 다시 대진국으로 거듭났고, 그 영토 역시 고구려 이상으로 확장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니 새로운 고구려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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